인간은 저마다 신념이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산다. 그 집은 차가운 세상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벽이자, 어두운 밤 홀로 깨어있을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기둥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때로는 그 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하지만 그 집이 너무 견고해져서 창문 하나 없는 성채가 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만 울리는 닫힌 방이 되는 순간, 신념이라는 따스한 온기는 모든 것을 태우는 파괴와 소멸의 불길로 돌변할 수 있다. 타인의 목소리를 소음으로 여기게 될 때, 가장 고결했던 신념은 가장 무서운 도끼가 되어 타인의 존재를 위협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음울한 페테르부르크의 안개 속을 걷던 가난한 법대생 라스콜니코프라는 위험한 신념의 집에 갇힌 인물을 창조했다. 그는 비좁은 다락방에서 ‘비범한 인간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낡은 도덕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라는 자신만의 완벽한 이론을 마치 수정처럼 벼려낸다. 그의 머릿속에서 고리대금업자 노파는 더 이상 한 명의 인간이 아니다. 그저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제거되어야 할 ‘이(louse)’라는 생명 없는 기호일 뿐이다.
그의 신념은 노파의 구체적인 삶과 고통, 그 주름진 얼굴을 냉정하게 지워버렸고, 오직 ‘대의’와 ‘논리’라는 흰 종이 위의 관념만 남겼다. 그가 휘두른 도끼는 곧바로 차가운 관념의 칼날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청년의 광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이론의 완벽함에 도취 된 채 그 틀에 맞지 않는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무서운 논리였다.
우리는 모두 매끄럽고 흠 하나 없는, 오직 나의 신념만이 메아리치는 방에 머물고 싶어 한다. 타인의 존재가 일으키는 마찰과 고통, 그 불규칙한 질감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자기만의 세계’라는 논리를 피 묻은 도끼로 증명하려 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종이 위에 쓰인 완벽한 이론은, 축축하고 비릿한 현실의 피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그의 논리가 결코 계산하지 못했던 것은, 계획에 없던 리자베타의 무고한 죽음과, 뼛속까지 스미는 인간적인 공포, 그리고 죄의식이라는 축축한 습기였다. 그의 견고했던 사상의 성채는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처절한 붕괴의 틈으로, 그의 이론 속에서는 벌레만도 못했던 존재, 창녀인 소냐가 걸어 들어온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차가운 지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에게 더 나은 이론이나 논리로 맞서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그의 끔찍한 고백을 ‘듣고’, 그의 고통 앞에서 ‘함께 울며’, 더러운 땅바닥에 엎드린 그에게 입 맞춘다.
라스콜니코프가 소냐라는 한 사람의 온전한 존재 앞에서 무릎 꿇는 순간, 그것은 그의 오만한 지성이 타인의 고통 앞에 항복하는 위대한 전환점이 된다. 그의 구원은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의 이론이 아니라, 얼어붙은 손을 맞잡아주는 타인의 온기를 배우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도끼를 버리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십자가를 택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저마다 ‘디지털 다락방’에 갇혀, 스크린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메아리만 듣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역시 우리 시대의 ‘이’를 찾아내어, ‘차단’과 ‘조리돌림’이라는 디지털 도끼를 휘두르고 있지 않나. 그 모니터 너머에, 라스콜니코프가 지워버렸던 노파처럼, 한 사람의 얼굴과 눈물과 삶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진정한 사유는 완벽하게 닫힌 이론의 성채를 쌓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완벽한 세계가 타인의 눈물에 얼룩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용기이다. 신념이 도끼가 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나의 견고한 집 창문을 활짝 열고, 나와 다른 타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만이 차가운 무기를,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건너가는 따뜻한 다리로 바꾸는 유일한 길이다.
차종관 세움교회 목사, 전 성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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