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양주 장흥 청련사

삼성전에서 내려다본 청련사 경내 모습. 유승혜
삼성전에서 내려다본 청련사 경내 모습. 유승혜

◇소멸과 생성의 교차로, 장흥 청련사의 가을

무성했던 여름이 소멸한 양주 장흥에는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들었다. 지난여름, 때마침 찾았던 장흥관광지의 산과 계곡에선 20대 옛 추억을 상기하며 오직 뜨거운 계절만을 봤다. 당시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지척의 사찰 절마당에 서서, 비로소 장흥에도 가을이 들었음을 실감한다. 깊어진 하늘과 불그스레 물들어 가는 나뭇잎들을 보며, 소멸은 텅 빈 허무가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이고 변화임을 깨닫는 순간이 새삼스럽다.
 

청련사 봉안당 ‘극락원’. 유승혜
청련사 봉안당 ‘극락원’. 유승혜

청련사를 방문한 숱한 이들의 발걸음은 ‘극락원’을 향한다. 청련사는 봉안당 극락원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산 자들의 기도와 망자들의 영원한 안식이 공존하는, 생과 멸의 인연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소란한 여름이 물러나고 고요한 가을이 사찰을 감싸듯 이곳을 찾는 유족의 슬픔과 고인의 육신은 낡은 인연으로 흩어지고 기억과 추모라는 새로운 인연이 피어난다. 계절의 순환이 그러하듯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다시 생겨나는 자연의 이치이기에, 헤어짐의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평안이 깃든다. 생멸을 오가는 발걸음을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태고종의 종지인 ‘전법도생(傳法度生)’의 정신이 실천되는지도 모르겠다.
 

청련사 생전예수재 모습. 사진=청련사
청련사 생전예수재 모습. 사진=청련사

생멸의 경계를 넘어, 무형의 가치로 피어난 ‘예수재’

생멸의 불이(不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청련사에서는 이와 무관치 않은 의식, ‘생전예수시왕생칠재(生前預修十王生七齋)’를 매년 가을 봉행한다. 예수재는 말 그대로 미리(​預) 닦을(修) 수 있는 재(齋)를 의미한다. 즉 살아있는 사람이 미래의 죽음을 준비하고 앞날의 과보를 미리 닦아 훗날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공덕을 쌓는 불교 의식이다. 크게 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의식(수행)으로 번뇌를 소멸하고 해탈에 이르러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준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 전후로 봉행하는데 올해는 지난 9월 11일 입재식을 했고 10월 29일에는 회향식을 치렀다. 청련사 예수재는 단순한 종교의식을 넘어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될 만큼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60년대부터 전통 방식으로 반세기 넘게 보존 · 전승됐고, 특히 서울 경기지역에서 발달한 불교 악가무(범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불자들에게는 내세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공덕을 닦는 행위이자 일반 대중에게는 불교 음악, 춤, 의례가 결합한 우리나라 무형유산으로 의미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매 순간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이라 탐진치로 인해 쌓은 업장을 한 시에 소멸할 수는 없다. 다만 예수재를 통해 현재의 삶에서 복덕을 쌓을 것을 다짐하고 집착과 욕심으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성찰하는 계기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련사 연못과 약사여래불. 청련사라는 이름은 무학대사가 법당 앞 연못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유승혜
청련사 연못과 약사여래불. 청련사라는 이름은 무학대사가 법당 앞 연못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유승혜

◇안정사 천년 인연, 장흥 개명산에 피어난 상서로운 연화

태고종 청련사의 첫인상은 사찰인 줄 모르겠는 네모반듯한 회색빛 현대식 건물(선양원)이라 다소 삭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해당하는 4층에 오르면 비로소 ‘절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건물의 옥상이 곧 절마당이요, 가람은 그 옥상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산기슭으로 이어져 크고 작은 전각들이 들어차 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현대식 건물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세이고 옥상의 전통 가람은 생사를 초월한 극락과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독특한 구조는 그렇다 쳐도 전각과 탑은 어제 지은 듯 말끔한 외양인데 사실 현재의 자리는 2010년에 마련된 것이다. 본래 신라 827년(흥덕왕 2년)에 현재의 서울 하왕십리 종남산에 창건됐던 안정사가 그 모태로, 2010년 주지 백우 스님이 양주 장흥면 개명산으로 절을 옮겨 새로 중창했다. 청련사는 무학대사가 1395년(태조 4년) 안정사를 중창할 적에 법당 앞 연못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나는 상서로운 기운을 보고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청련사에서 바라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유승혜
청련사에서 바라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유승혜

◇산세에 안긴 청련사, 호작도 인연으로 닿다

옮겨온 절에도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연못이 있다. 연못 중앙에는 약사여래불이 서 있고 그 옆으로 윤장대가 자리한다. 물소리를 들으며 드르륵, 드르륵 윤장대를 돌릴 때 마음은 평안하고, 4층 높이의 절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장흥관광지 일대는 계곡을 중심으로 일영봉과 개명산으로 이어지는 산세에 둘러싸여 골짜기의 푸근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 자체로 한바탕 소풍 같은 풍경이다.

그중 하얀 외관의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이 눈에 띄는데, 건물은 장욱진의 작품 ‘호작도’ 속 호랑이를 형상화해 설계한 것이다. 미술관의 입체적인 형태는 이곳 절마당에서 가장 잘 보인다. 잘 알려졌듯 장욱진 화백의 작품 곳곳에는 불교적 사유가 깊이 투영돼 있다. 아내의 모습을 관음보살로 묘사한 ‘진진묘’를 비롯해 ‘심우도’, ‘팔상도’ 등이 불교를 주제로 한 대표작들이다. 그는 생전 통도사 경봉 스님에게 비공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청련사와 이웃한 미술관은 그렇게 또 인연이 닿는다.
 

조선 후기 제작된 청련사 관음보살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유승혜
조선 후기 제작된 청련사 관음보살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유승혜

◇천년고찰 명맥 잇는 조선 후기의 성보들

너른 마당에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과 원통보전, 명부전, 삼성전 등 청련사의 주요 전각들이 단차를 두고 자리한다. 각 건물에는 청련사의 성보들이 봉안돼 있다. 청련사가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로 절집을 옮길 때, 비록 이건된 옛 전각은 없었으나 천년고찰의 명맥과 정신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성보들은 여러 점이 옮겨졌다.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물, 청련사 관음보살좌상 및 복장물, 청련사 현왕도 등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이 11점, 청련사 아미타불회도, 청련사 석조여래좌상 및 복장물 등 경기도문화재자료가 4점으로 총 15점의 성보가 있다. 생전예수시왕생칠재는 경기도무형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들 문화유산은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됐다.

성보가 여럿이라 무엇이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를 객들을 위해 전각마다 봉안 성보들에 대한 설명을 안내판에 소상히 적어뒀다. 가령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에 대해선 아미타불이 어떤 역할을 하는 부처인지부터 친절하게 안내한다. 불상과 그림이 여러 점이라 안내판만 제대로 읽어도 기본적인 불교 상식을 익힐 수 있다. 포교는 이런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청련사 대웅전 앞 배롱나무의 꽃이 10월이 되어서도 지지 않았다. 유승혜
청련사 대웅전 앞 배롱나무의 꽃이 10월이 되어서도 지지 않았다. 유승혜

◇떠난 것이 아니라 변한 것일 뿐

절 곳곳에는 불자들이 시주한 석등과 꽃나무들이 고요하고 또렷하게 존재한다. 10월까지도 꽃송이를 놓지 않은 대웅전 앞 배롱나무는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수년 전 기증했다. 여름 내내, 1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 꽃을 피우는 나무라 해서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의 꽃말은 ‘떠나간 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몇 년 전 배우 조현철 씨가 백상예술대상 조연상을 수상하며 남긴 소감이 소소하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시한부 아버지를 향해 “죽음은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일뿐”이라는 용기와 위로를 전했다. 그의 말대로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 떨어지는 빗방울 등 우리 주변의 자연 만물은 변화한 존재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태고종의 종조인 태고 보우 스님이 지향했던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정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지 않고 모든 존재를 포용해 하나로 통하게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청련사가 극락원과 예수재를 함께 운영하며 산 자와 망자 모두를 아우르는 것은, 바로 이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깨달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전법도생의 모습일 것이다. 떠나간 이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평안함으로 피어난다.
 

10월 말까지 천일홍이 만발한 양주 나리공원 . 유승혜
10월 말까지 천일홍이 만발한 양주 나리공원 . 유승혜

◇청련사 주변, 곳곳이 소풍 명소
 

청련사를 떠나온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으로 향한다. 과거 가족 피서지, MT와 수련회 장소로 인기 있었던 장흥관광지는 이제 문화예술단지로 명성을 굳힌 지 오래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우리나라 구상조각 1세대 조각가인 민복진 작가의 작품을 다룬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과 정원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예술가의 웅숭깊은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어 시간을 넉넉히 잡고 가야 한다.

이들 미술관 정문에서 750m 거리에 가나아트파크가 있다. 가나아트파크에 위치한 통나무 산장 스타일의 스타벅스 또한 장흥의 명소인데 미술관 카페답게 내부에도 현대미술 갤러리가 마련돼 있다. 가나아트파크 길 건너편에는 배우 임채무 씨가 운영하는 어린이 실내테마파크 두리랜드가 있다.

역사적 명소로는 권율장군묘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 42기 중 하나인 온릉 또한 가까운데 솔숲 산책하기 좋은 장소다. 온릉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의 묘다. 장흥에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아서 청련사와 함께 하루 나들이로 찾기 좋다. 조금 거리는 있지만 10월 말까지 천일홍과 코스모스가 한창인 양주 나리공원도 양주가 자랑하는 가을 명소다.

글·사진 = 유승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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