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협회, 경기지역 민권운동과 계몽운동을 주도하다

(10) 박문협회, 경기지역 민권운동과 계몽운동을 주도하다




국민국가 수립이 좌절되다

포함(砲艦) 외교에 의해 강요된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국제사회 일원이 되었다. 지배층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서구화된 일본의 문물이나 제도 등을 도입하였다. 이어 미국·영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과 통상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이제 조선은 ‘은둔국이나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편 개항장에 형성된 생소한 조계지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통상 거주와 치외법권 등을 인정받은 저들은 각종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다양한 자치 조직도 운영했다. 저들은 조선인을 ‘미개인·야만인’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우월감마저 스스럼없이 드러내었다. 자신들은 근대 문물의 시혜자인 것처럼 군림하기를 마냥 즐겼다. 이에 비례하여 외국인에 대한 불신감이나 의혹은 ‘활화산’처럼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문명이란 유교적 교화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다. ‘개방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문명 개념은 서구의 가치 기준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국민국가로서 국가통합·국민통합·경제통합·문화통합 등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중화제국 중국은 멸시의 대상이 된 반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새로운 개혁 모델로서 급부상하였다.

개화파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은 개화정책에 소극적인 보수정권 타도에 나섰다. 바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이들의 ‘일본식’ 개방화 정책 실현을 위한 일환이었다. 이들은 청나라 속방에서 벗어나고자 일본을 우군으로 내세웠다. 외세를 등에 업고 또 다른 외세를 몰아내려는 무모한 계획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청나라는 강경 진압과 아울러 내정간섭을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국민국가를 수립할 가능성마저도 치명상을 입었다. 결국 개화정책은 재야세력과 민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다.

10년이 지난 갑오·을미개혁에서 다시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일본에 의존한 개혁은 태생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실패로 막을 내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보호국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으로 친일 개화파는 역사 무대에서 퇴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대신 정권을 장악한 친러세력은 철도부설권·전신선가설권·광산채굴권·산림벌채권 등 각종 이권을 열강에 넘겨주고 말았다.

독립협회는 시대적 소명을 해결하기 위하여 1896년 7월 조직된 민권 계몽 단체였다. 슬로건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분에 구애되지 않는 평등하다는 민권사상·법치주의·주권수호사상 등을 내걸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이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난 자립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독립협회는 기관지인 ‘독립신문’ 발간, 독립문과 독립관 건립 등 독립국가로서 면모를 알리는데 집중하였다. 기관지를 통하여 열강에 넘어간 각종 이권 환원, 자주독립과 민권의식·참정권 의식도 강조하였다.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는 백정 박성춘(朴成春)은 만민공동회 연사로 참여하는 등 민중의 정치 참여 의식을 획기적 승화시켰다. 이러한 외세배격 투쟁으로 러시아 고문관들은 친러 세력 쇠퇴와 더불어 이 땅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1898년 12월 보부상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일시에 파괴하였다. 입헌군주제를 소망했던 독립협회 세력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일본과 러시아 등을 업은 노력은 산산조각으로 끝났다.



박문협회가 인천에서 조직되다

인천인들은 독립협회 조직된 직후부터 관심을 집중하였다. 기독교인 복정채는 독립협회 후원과 아울러 그의 시국관을 ‘독립신문’에 투고했다. 주요 논지는 충군애국과 자주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 표현이었다. 내리교회 신도 김기범(金箕範)이나 전경택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투고한 ‘경축가’와 ‘애국가’ 등은 이들의 현실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노래는 고종의 탄신일을 맞아 기도하면서 불렸다. ‘충심애군, 문명진보, 자주독립, 국태민안, 부국강병’ 등은 주제어였다. 심지어 상봉루 기생 9명은 독립협회에 의연금을 보내는 등 ‘자기역할’에 충실하였다. 냉대와 멸시를 받는 벙어리조차도 의연금 대열에 동참할 정도였다.

만민공동회를 통한 민중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개항장 인천에 최초의 계몽 단체가 탄생했다. 1898년 6월 9일 조직된 박문협회(博文協會)가 바로 그것이다. 명칭은 ‘논어’ ‘안연(·淵)’편의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라는 의미에서 나왔다. 곧 인문학을 널리 배우고 예의 규범을 몸에 익혀서 공동체를 혼란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단체는 독립협회 자매단체이자 지회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창립 직후 회원은 130여 명에 달할 만큼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우선적인 과업은 신교육 보급을 통한 민지 계발이었다. 이에 회관 내에 관보·신문, 시무상에 유익한 서적을 두루 완비하였다. 회원들은 날마다 모여 연설과 토론을 통하여 지식과 신학문 등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통상회를 개최하여 주민들에게 시대 변화상을 일깨웠다. 회관은 단순한 집회 장소 차원을 넘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근대적인 도서관이었다.

연설회장에는 태극기를 앞뒤에 각각 배치하고 국가와 황제에 대한 일련의 의례를 거행했다. 통상회에 대한 보도 기사는 당시 계몽 단체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지방자치를 위하여 각지에 조직된 향회(鄕會)·민회(民會)·민의소(民議所)·농무회(農務會) 등도 이와 유사하게 운영되었다. 민의를 수렴하는 여론 공론장으로서 성격을 지닌다. 통상회 주요 내용은 신문 구독의 필요성과 신교육에 대한 관심 고취에 있었다.

회원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계몽운동 확산을 전개하였다. 인천항 경무서 총순 한우근(韓禹根)은 민중계몽과 근대교육 보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설회에서 ‘회(會)’자의 의미를 설명한 후 단체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단체 활동과 준법정신 강조는 새로운 사회질서에 부응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인 셈이다.

위생문제도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단발은 토론회를 거쳐 실시된 대표적인 결실 중 하나였다. 회원들은 토론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함으로 자신감을 배양할 수 있었다. “침묵은 미덕이라”라는 격언은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토론문화는 확산되는 가운데 학교의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기지역 계몽·교육활동을 견인하다

회원 증가와 더불어 조직 정비 등을 통한 중장기적인 활동 계획도 수립되었다. 임원진으로 회장은 이학인(李學仁), 부회장 나동한, 전 임시의장 강준(姜準), 회원 유한식·김기범·박현보·이용인·이동환 등은 주요 활동가였다. 이들은 인천부청·인천해관·경무서 등 관료, 인천외국어학교 교사·학생, 신상회사 임원, 내리교회 신도 등이었다. 그런데 제정러시아 전제정치를 지향한 대한제국 지배층은 강제로 독립협회 해산시켰다. 이와 더불어 박문협회 활동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회원 중 일부는 보안회·헌정연구회·대한자강회에 가담하여 계몽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또한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에 맞서 근대적인 상업 단체나 회사 운영과 근대교육 보급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사립학교와 야학 설립을 주도하거나 후원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단연동맹회·노인계 등을 결성하여 국채보상운동에도 자발적인 참여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랏빚 청산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의지는 더욱 빛을 발하였다.

박문협회도 야학인 사립영어학교를 설립·운영했다. 교장은 박문협회장이 겸임한 반면 교사는 인천해관에 근무하는 강준과 이학인 등이 맡았다. 피교육자는 회원과 외국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주민들이었다. 특히 회원들은 2배에 달하는 월연금을 쾌척하는 등 아낌없는 지원에 나섰다. 백범 김구(金九)는 양봉구와 함께 인천감옥에 수감 중 죄수들을 상대로 근대교육을 보급에 열정적이었다. ‘인천감리서학교’라고 불릴 만큼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1900년 9월 사립영어학교를 계승한 박문학교는 개교했다. 설립주체는 천주교 제물포본당·샬트르 성바오로 인천분원 수녀들, 박문협회 지회원 등이었다. 이 학교는 에우제니오 드뇌(全學俊) 신부의 활약으로 영화학교와 더불어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강제병합 직전까지 인천지역에 설립된 사립학교와 야학 등은 30여 개교 이상에 달했다. 박문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회원들은 명예교사로 자원하는 열정을 보였다. 이는 인근 강화도·부천·김포 등지는 물론 경기도 각지로 파급되었다. 수원 삼일여학당·삼일남학당, 강화도 합일학교·보창학교·계명의숙, 개성 한영서원·정화여학당 등은 박문협회 활동에 자극을 받은 인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러일전쟁 발발을 전후로 국망(國亡)에 대한 위기의식은 증폭된다. 교육구국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시기를 맞는다. 군 단위로 시행된 의무교육은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 중 하나이다. 이동휘는 강화 학무회를 조직한 후 학구(學區)에 의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운영비는 생활정도에 따른 ‘의무교육비’와 유지층 의연금으로 충당되었다. 개성교육 총회도 관내 향학열을 고취시키는 가운데 연합대운동회를 개최하여 근대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박문협회는 짧은 기간 동안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외세의 각축장이 된 개항장 인천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흐름은 경기도 각지로 파급되어 교육·계몽운동을 국권 회복운동으로 전개되는 든든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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