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熊本)는 일본 큐슈에 있는 한 현(縣)의 이름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행정구역 단위로 현이 있었다. 그 현의 수령을 ‘현감’ 혹은 ‘현령’이라 했다. 현에도 등급이 있었던 셈이다. 현의 면적은 대체로 군보다 조금 작았다. 현재 일본의 현은 면적이 조선시대 현보다 훨씬 크다. 한 현의 크기가 대략 우리나라 한 도 정도 크기라고 보면 된다. 큐슈에는 모두 7개의 현이 있다.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후쿠오카, 오이타, 미야자키, 가고시마, 쿠마모토, 나가사키, 사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은 후쿠오카와 오이타가 아닌가 싶다. 오이타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온천지인 유후인과 벳푸가 있다. 그에 비해 쿠마모토는 한국인에게 조금 낯선 곳이다. 요즘 들어 쿠마모토를 찾는 한국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쿠마모토의 유명한 쿠로가와[黑川] 온천을 찾아서이다. 쿠로가와는 아소산에서 흘러내린 물과 온천수가 섞여 이룬 작은 시내이다. ‘쿠로’는 검다는 말인데, 물이 ‘맑다’고 해서 혹은 ‘검푸르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시내를 사이에 두고 오래전부터 온천 료칸들이 하나 둘씩 생겼고, 그것들이 모여 아담한 마을을 이루었다.

필자는 지난 겨울 가족과 함께 쿠로가와를 다녀왔다. 인천에서 후쿠오카로 가지 않고 바로 쿠마모토 국제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미리 예약해 둔 렌트카를 인수받아 쿠로가와로 향했다. 공항에서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이다. 쿠마모토 시내를 빠져 나와 조금 달리다 보니 멀리 웅대한 아소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소산의 등허리와 산자락은 온통 누런 갈대밭 세상이었다. 아소산의 하늘은 청명했다. 아직 겨울인데도 날은 봄처럼 포근했다. 우리들은 그 사이로 난 길을 굽이굽이 돌아 산을 넘었다.

다음 날은 종일 가는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은 동네나 한 바퀴 산보할 요량으로 숙소를 나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애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는 료칸 앞에서 사진도 찍고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군것질도 하면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쿠로가와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중학교 3학년 딸은 심심하고 재미없다면서 입이 삐죽 나왔다. 어제 보지 못한 아소산의 다른 쪽을 차를 가지고 가보자고 했더니 싫다고 했다. 쿠마모토 성도 싫다고 했다. 난감했다. 그러다가 순간, 쿠마모토에는 손바닥 만한 쿠로가와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쿠마모토에는 재미있는 것이 없다. 온통 자연뿐이다. 아소산뿐이다. 아소산의 갈대뿐이다. 아니, 그것이 바로 쿠마모토이다. 쿠마모토에 왔으면 쿠마모토를 즐길 뿐이다. 그것이 여행하는 이유가 아닌가? 쿠마모토를 더 가까이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나와 아내는 아이를 료칸에 남겨두고 차를 가지고 나왔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가 가까웠다.

가도가도 갈대숲이었다. 갈대숲이 끝나는가 싶더니 잡목으로 우거진 거칠고 칙칙한 숲이 나왔다. 숲 사이로 길은 계속되었다. 무서웠다. 무엇인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원시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쿠마모토 숲의 공포를 체험하고서야 왜 일본 애니에 그렇게도 자주 숲의 정령들이 출현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믿는 신토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고 미신도 아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김창원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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