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 무신정권의 탄생으로 고려의 집권자로 우뚝 선 이의민은 아들 이지영을 강인한 무관으로 성장시키고 싶어 압록강 일대를 지키는 삭주(朔州)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보냈다. 이지영은 압록강 일대로 순시를 하다가 너무도 아리따운 여인을 만났다. 바로 자운선(紫雲仙)이었다. 양수척이라 불리는 집단에 속한 자운선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먹고 사는 여인이었다. 자운선에 한눈에 반한 이지영은 그녀를 자신의 애첩으로 삼고 그녀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 자운선에 대해 조선후기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우리 역사상 기녀(妓女) 집단을 만든 여인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사실 기녀는 역사적으로 신라 시대에도 존재하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유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기녀 천관녀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로 볼 때 신라의 기녀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지만 고구려의 기녀이야기는 기록상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고려사에 나온 자운선의 이야기를 통해 평양 일대의 기녀 이야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춤과 노래를 통해 잔치의 중심에 있는 기녀는 다른 말로 해어화(解語花)라고 부른다. 해어화란 ‘말하는 꽃’이란 뜻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한 이가 말을 한다고 해서 해어화라 불렀다. 말을 한다는 것은 노래를 하는 것이고, 그 노래와 더불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서 최고의 기녀는 단연 평양의 기녀와 진주의 기녀를 꼽는다. 평양기녀 계월향(桂月香)과 진주 기녀 논개 때문이다. 계월향은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무장이었던 김경서와 함께 평양을 장악한 왜장을 죽이고 안타깝게 죽은 여인이다. 논개 역시 진주 남강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자결한 의기(義妓)였다. 그래서 평양 기녀와 진주 기녀는 일반 기녀들과 다른 평가를 받았다.

평양의 기녀들은 계월향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여 정조(情操)를 중요시 여기며 춤과 노래와 기예를 최고의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그 교육 기관이 바로 ‘평양교방(平壤敎坊)’이었다. 평양은 삼국시대 이래 자연의 풍부한 물산과 경승지로 도읍 내지는 도읍에 버금가는 도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중국으로 떠나는 사행단과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신단이 머무르며 다양한 형태의 문화와 상업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기방 문화가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평양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평양지(平壤誌)’에도 평양에 기녀들을 둔 이유중의 하나가 중국에서 오는 사신단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평양은 관기(官妓) 숫자가 일반 도시들에 배해 몇 배에 해당되었다. 평양지에 기록된 교방 소속의 기녀는 180명이었다. 180명의 평양교방 기녀는 평안도 감영 소속의 관기인 영기(營妓)와 평양부 소속의 부기(府妓)로 나뉜다. 평양 교방에서는 쌍화점, 처용무, 선유락, 검무 등 다양한 무용을 가르쳤고, 기녀들은 평양만의 무용인 서경악부 18무(舞)를 익혀야 했다. 그래야만 온전한 평양 기녀가 될 수 있었다. 평양의 기녀들이 추었던 선유락은 1795년(정조 19) 수원 화성에서 개최되었던 혜경궁 홍씨 회갑연의 마지막 무용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평양의 무용이 정조임금에게 선을 보인 것이다. 이럴 정도로 중앙의 연향에까지 활약한 평양 교방은 더욱 더 기녀들의 교육에 특별한 힘을 쏟았다. 평양 교방은 평양으로 발령받은 평양감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평양 백성들을 위한 대규모의 잔치에도 참여하여 뛰어난 가무를 자랑하였다. 그래서 평양 교방의 기녀들은 자신들이 백성들을 위한 기녀라는 자부가 강했다.

얼마 뒤 평양 교방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삼지연관현악단이 이제 평창올림픽 기간에 남쪽으로 내려온다. 북한을 방문하는 국빈(國賓)을 위한 공연을 담당하는 삼지연관현악단 140명이 서울과 강릉에서 공연을 한다고 한다. 이들은 북한의 체제를 강조하는 노래와 무용은 빼고 남과 북의 국민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 중심으로 공연을 준비한다고 한다. 이들의 공연이 한반도 전체의 화해를 위한 축제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더해 남북 접경지대인 경기도에서 공연이 있었으면 한다. 평양교방의 기녀들이 추었던 선유락이 수원 화성행궁에서 시연되었기에 그 후예들이 다시 수원에 와서 멋진 음악과 무용을 들려주었으면 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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