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쉼터, 치유의 공간 (18)의왕 성 라자로 마을과 성당


의왕 오전동 모락산 자락에 자리잡은 성 라자로 마을은 단풍이 한창이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방해받지 않고 빼곡히 잘 자라서 아름다운 시절을 보여주고 있다. 라자로 성인의 이름을 딴 이 마을은 한센병 환우들이 치료를 받고 재활하기 위한 공동체로 생겨났다. 이름에서 풍기듯 이곳은 천주교(수원교구)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은퇴한 사제들이 여생을 묵상하며 보낼 수 있도록 조성된 사제 마을과 치유와 휴식이 필요한 모두에게 열린 성당, 피정을 원하는 일반 신도를 위한 공간도 있다. 풍요로운 자연을 거닐고 싶은 산책객도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는 열린 곳이다.

잘 닦인 언덕길 주변으로 싱그럽게 조성된 공원이 한참 펼쳐진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만 들려오니, 고요히 걷는 것 만으로도 묵상과 기도의 시간이 될 것 같다. 산책하는 동안 사람들과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마을 안이 워낙 넓기도 하지만 거주하는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 아무런 행사가 없는 한가로운 평일 오후, 마치 텅 빈 마을에 홀로 남은 것처럼 숲을 걷고 듬성듬성 놓인 작은 방갈로들을 살피고 이 마을을 열고 가꾼 캐롤 안 주교와 이경재 신부의 흉상을 살펴보고 성당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가볍게 들를만한 곳은 아니다. 마을 곳곳에 성모상과 예수수난의 조각상이 여럿 보인다.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는 예수의 조각상이 높다랗게 서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한 신도들은 그 아래서 눈물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조각상의 아랫부분에 ‘목마르다’라고 적힌 요한복음서의 구절을 보니 마음이 아찔하다. 그 무게와 고통이 내 것인 양 다가왔다. 목마름, 살갗이 터지는 통증,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 붉은 선혈, 길고 고통스런 길 끝에는 도와줄 이도 없고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상실감 등등…. 예수가 걸었던 골고다의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심정이다. 고통, 상실, 체념, 달관의 감정이 고조됐다가 가라앉기를 여러 번 한 후에야 고즈넉한 언덕 위 성당에 이르렀다. 산 중턱이라서인지 볕이 살짝 기울었음에도 이른 어스름이 찾아왔다.



성 라자로 마을 예수성심 성모성심 성당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예수성심 성모성심 성당에 도착했다. 1975년 건축가 유희준이 설계한 이 성당은 오래된 서양 교회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설계됐다. 쥘부채를 편 듯 활짝 펴진 완만한 곡선이 편안하다. 성당의 앞쪽은 살짝 들려서, 푸른 숲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려는 배의 모습같기도 하고, 푸른 물결이 솟구쳐 하얗게 포말을 일으킨 파도처럼도 보인다.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모습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외관은 돌 타일을 겹쳐 붙여 자연스럽게 요철이 생겼다. 재료가 만들어낸 가벼운 장식성이 결코 과하지 않는 이 모습도 어딘가 한센병 환우를 떠올리게 한다.

십자가가 매달린 하얀색 종탑은 출입구 쪽에 따로 있다. 넓게 퍼진 부채의 가장자리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신성한 장소의 출입구를 알린다. 성당 앞에 다미안 신부와 이와시타 신부의 2인흉상(조각가 김세중)이 있어, 한센병 환우를 돌보다가 선종한 두 신부를 기념하기 위한 성당임을 분명히 한다.

내부로 들어서면 묘한 공간감이 감돈다. 완만하게 상승하는 곡선으로 처리된 천장이 제단을 향해 뻗어있다. 십자고상이 걸린 제대 뒤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내고 있을 뿐, 거대한 바윗돌을 깎은 듯한 거칠거칠한 제대와 특별한 장식없이 말끔하게 정돈된 벽면은 간결하면서도 신실하게 다가왔다. 신도석은 2층으로 구분돼 있다. 한센병 환우와 일반인 신도를 분리하려는 목적인데 환우를 위한 좌석을 더 높은 곳에 배치했다고 한다. 환우의 수가 줄어들고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격리에서 치료와 재활로 바뀐 요즘도 그 배치를 그대로 따르는지는 모르겠다.

스테인드글라스도 눈여겨 봐야한다.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 분야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분인 남용우 선생의 초기작(1975년작)이다. 제대 뒤에 있는 길쭉한 직사각형은 예수와 성모를 표현한 상징들을 배경으로 환우의 고통을 종교로 승화하는 장면이 담겼다. 푸른색은 성모의 색이며, 붉은색은 고통의 흔적이다. 병과 고통을 보여주는 목발, 승리와 환희를 표현하는 종려나무 가지가 붉고 푸른 빛물결 위로 사뿐히 떠올랐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조각 가장자리에 쓰는 납선 위에 검은 안료로 삐침 형태를 그어 날카로운 가시를 표현했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의 고통과 환우의 고통이 동일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왼쪽의 둥근 스테인드글라스는 ‘승리의 가시관’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제대의 것과 유사한 주제지만 더욱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돼 있다. 붉고 푸른 대비감이 강렬하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침나절의 강한 빛을 머금게 되면 성당 안은 강한 빛깔들이 이글거리며 공간을 색과 빛으로 채울 것이다. 이때 예술을 통한 강렬한 신앙의 체험도 가능하지 않을까?

오른쪽 둥근 원과 왼쪽 벽, 신도석 뒤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제작 연대가 조금 뒤다. 라자로 마을의 모든 건축물과 성미술품처럼 신도들의 후원과 국내외 한센병지원단체로부터 기금을 모아 하나씩 축성된 것이기에 연대가 일정하지 않다. 이 성당도 일본의 성심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바자회 성금과 나가사키 순심성모회 수녀원의 기부금, 그리고 많은 신도의 정성이 모여 지어졌고 1975년 축성됐다.



치유와 재활, 휴식의 환우 공동체

처음 성 라자로 마을이 탄생한 것은 1950년 6월2일,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의 캐롤 안 신부에 의해서였다. 일제강점기 한센병은 의료선교사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였다. 한센병 환우를 격리하던 소록도 갱생원이나 선교사들의 재활병원 외에 그들이 머물 곳은 거의 없었다. 광복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카톨릭 구제회와 미국 종교단체구제사업회의 한국 책임자였던 조지 캐롤 안 신부는 광명 신기촌에 ‘성라자로요양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전쟁이 터졌고 그 다음 해 뿔뿔히 흩어진 공동체를 재건한 곳이 지금의 의왕시 모락산 주변이다.

주변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환우의 치료와 요양, 재활에 몰두해온 과정이 녹록치 않다.

마을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데에는 초대원장이자 7대 주임신부인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의 역할이 컸다. 신부와 환우 사이에는 영적인 교감이라 할 정도로 끈끈한 유대감이 생겨났고 환우들의 자녀 교육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해외 구라사업단체와 연계해 해외원조를 받고 기부금을 모으며 마을은 변화했다. 점점 고령화되는 환우를 위한 시설 등 삶을 섬세하게 보듬어주는 다양한 시설들이 생겨났다. 아름다운 성당도 그 즈음에 마련된 것이다. 1990년대부터는 받은 도움을 되돌려주는 실천도 하게 됐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구라(救癩)사업 단체들은 무척 다양하다. 성당에 축성된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환우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던 하와이 몰로카이 섬으로 들어가 그들의 친구가 돼 치료와 영혼의 안식을 위해 봉사했다. 그 역시 한센병에 걸려 선종했는데, 이 일 이후 다미안 재단을 비롯해서 한센병을 치료·연구하는 수많은 연구단체 및 구호단체가 설립됐다고 한다. 이와시타 신부 역시 일본 근대 구라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성라자로 마을에 거주하는 환우는 40여 명 정도라고 한다. 한때 기피의 대상이었던 환우촌은 푸른 휴식처를 제공해주는 도시의 오아시스가 됐다.



근대건축유산에 대한 다양한 접근

1975년에 지어진 성당도 근대문화유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근대건축물은 개항 이후인 19세기 말부터 1950년대까지의 건축물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근대적 건축활동이 생겨난 19세기 초부터 1970년대까지 아우른다. 완공된 지 50년이 넘어가는 건축물은 일단 시대와 함께해온 역사성을 부여해 보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근대건축유산은 짧은 시기에 등장한 건축물이지만 현재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경우가 많고 한국전쟁과 그 후 재건시대를 거치며 상당수 멸실돼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차원에서 건축물의 문화유산 등재에 큰 의미를 둔다. 한편 1960~1970년대의 건축물은 상대적으로 그 가치를 높게 보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집이건 빌딩이건 건축물 자체가 부족했던 시대, 다급하게 지어 올리느라 성능이 좋지 않는 경우도 있고 당시의 미적 가치를 높게 두지 않는 인식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재건축이라는 미명하에 반론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자본의 논리 속에 사라지고 있다.

종교건축물은 다른 건축물들에 비해 생존률이 높은 편이다. 쓰임에 큰 변화 없이 꾸준히 사용되고 보수 관리되고 있어 근대건축유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도들의 기부금과 자발적인 신앙심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무형의 가치도 높다. 성라자로마을은 국가에서 지정한 문화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역과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온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한센병 치유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로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온전히 마음을 베푼 신앙의 공동체로서, 사회교육의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 성당과 같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미술품들이 공존하므로 복합적으로 예술의 가치를 지니는 장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풍요로운 자연과 따뜻한 마음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시민들이 일상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귀한 장소로 이곳이 오래 유지된다면 더욱 좋겠다.

최예선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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