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에 공헌한 산업 관련물 (16)우리의 근대산업유산

▲ 청평댐
근대산업유산은 근대화과정에 공헌한 산업 관련물이다. 서구는 산업혁명 이후에 공업 위주의 산업을 말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구조물로 시작하며 본격적인 산업유산은 경제개발계획 이후로 봐야한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공업위주가 아닌 농업, 공업 등으로 넓혀, 공장이나 창고 등 건축물, 교각, 댐, 저수지 등의 구조물과 설비, 재료 등이 해당한다.2004년에 조사한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는 산업구조물을 교량, 터널, 댐, 굴뚝, 담장 등으로 분류했다. 당시 조사에 따라 지역별, 시설별 편차가 있으나 철도관련 시설과 댐, 저수지 등이 주를 이룬다. 보고서는 연천역 급수탑, 강매동 석교, 북한강 철교, 동안역 철교, 옛 창리 철교, 장군나루 교각, 오천교, 갈산철도 교량터, 행죽리 철도교각, 노탑 철도교각, 진리교, 옛 곡릉천 철교, 말레이시아교, 구룡교, 삼화교, 청평댐, 팔당댐, 옛 국립항공학교 비행장, 남태령 옛길, 옛 갑곶나루, 동안역철도레버, 수인선, 물왕저수지, 옛 소유리금광산, 천서양수장, 연천역화물플랫폼, 옛 백운저수지, 옛 산정리저수지, 옛 임업시험장광릉출장소 등 총 29개를 기록했다.

이번에 연재하는 글은 철도관련시설과 댐 저수지다. 일본은 쌀 생산 증량을 목적으로 저수지와 댐을 쌓았으며 그것을 운반하는 교통 시설로 철도를 만들었다. 철도 부설은 근대화의 상징이지만 촘촘한 철도망으로 국내 물자와 인력을 실어 나른 일본의 산업화 목적을 알 수 있다.


▲ 연천역 원통형 급수탑.

증기기관차 철도 시설물 가치 인정 ‘연천역 급수탑’

철도 시설 중에는 연천역 급수탑이 대표적이다. 연천역은 용산과 원산을 오가던 경원선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1911년 용산에서 의정부 구간을 개통하고 1912년 7월에 연천역, 10월에 철원역까지 연장한 후 1914년에 완전하게 개통했다. 경원선이 완전하게 개통할 즈음에 연천역 급수탑이 준공됐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로,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해 기능을 다했지만, 증기기관차 관련 철도 시설물로 가치를 평가받아 2003년 1월28일에 등록문화재 제45호로 등록됐다.

연천역 급수탑은 상·하행선에 각각 있다. 연천역사의 정면에서 오른쪽 진입로 끝에 원통형 급수탑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공원에 상자형 급수탑이 있다. 상자형 급수탑은 콘크리트 구조에 기단, 벽체, 지붕으로 이뤄졌고 벽면에 줄눈을 그려 언뜻 돌을 쌓은 조적구조로 보인다. 원통형 급수탑은 높이 23m, 둘레 18m로 100t을 저장할 수 있었다. 내부에 급수관 3개와 기계 장치가 남아있고 외부는 탄흔 흔적이 선명하다. 연천군의 일부는 38°선 이북으로 한국전쟁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며 현재도 분단의 상황이 느껴지는 곳이다. 연천역은 전쟁 이전에 북한의 최남단으로 1948년에 화물과 군사물자를 하역하는 플랫폼을 건설해 북한군의 군사물자를 하역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조종사에 따르면 연천역 급수탑을 좌표로 삼아 폭격해, 역사는 폭격으로 사라졌으나 급수탑은 원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북한강 철교.

철도를 부설할 때 강이나 하천을 건너는 철도 교각이나 다리는 철거되거나 교각 받침만 남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북한강 철교가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우동선 교수팀의 조사에 따르면 1939년에 건설해 남양주시와 양평군을 연결하는 철교로 전체 14개의 교각으로 구성됐다. 양평 쪽에서 6번째 교각부터 이후 3개의 교각은 다른 교각보다 상대적으로 두껍고 간격이 넓어 상부에 철제 트러스가 있는데, 이는 수심의 차이로 보았다. 한편 경춘철도주식회사가 1939년 7월25일에 경춘선을 개통했으므로 그 즈음에 철교가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 팔당댐.

일제의 침략 정책으로 시작된 근대적 ‘댐’

우리나라는 여름에 폭우가 잦고 벼농사를 지어 치수사업이 중요했다. 백제때 전라북도 김제시 벽골제와 신라시대에 충청북도 제천시 의림지가 대표적인 저수지다. 근대적 댐이나 저수지는 192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에 침략 정책으로 시작됐다. 북쪽은 자연조건을 이용한 대용량의 전력 확보와 중공업 정책으로 대규모의 수력발전용댐 건설하고 남쪽은 평야지대를 이용해 식량 생산 증대와 미곡 증산을 위해 수리시설을 개발했지만, 주로 중소규모의 저수지 중심이다. 수원 확보가 손쉬운 지역에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축조해 논을 관개하는 것으로 규모가 크지 않다. 논밭에 물을 대거나 빼는 농업 관개용, 전기 발전용, 용수 전용 등으로 건설했으며, 특히 용수 공급용 댐은 일본인이 많이 사는 소도시에 생활용수를 공급하려는 상수도 수원 확보를 위한 댐들이다. 당연히 일본인이 사업주체고 한국인은 노역에 일부 참여하는 정도였다.

해방 후에는 미국과 유엔의 원조로 기존 제방, 둑, 보 등의 관개시설을 수리하거나, 하천이나 황무지를 개간해 가뭄에 대비한 지하수 개발과 저수지 축조 등이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처럼 물이 많은 곳을 정해 소규모로 시행됐으며 주로 단일 목적의 중소규모로 개발했다. 정작 가뭄과 홍수에 큰 피해를 받는 곳은 혜택을 받기 힘들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점차 공업과 도시가 발달하며 경작지 면적이 줄어 농업용수 외에 공업용수와 도시 생활용수 및 발전용수 등을 위한 다목적 댐이 등장한다.

경기도는 북한강에 청평댐과 북한강, 한강,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팔당댐이 있다.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청평리에 옛 청평제(淸平堤)가 청평댐이다. 1939년 8월에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가 북한강 하류에 1억8천500만t의 댐 공사를 착공했으며 그 크기는 유역면적 9천921㎡, 댐높이 31m, 댐길이 407m였다. 히타치(日立)제작소에서 주요기자재를 공급했다. 정초석에 적힌 건립년도는 일본의 연호라서 도려냈으나 1943년 5월에 준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24개의 수문(원래 25개)이 있으며 댐 내부의 도로는 통행을 금지했다. 제방이 잘 남아있고 한국전쟁 때 파괴된 발전시설은 1952년에 복구, 1966~1967년에 증설한 것으로 ‘가평군지’에 적혀있다.

청평댐에서 3km 남짓 떨어진 곳에 청평유원지는 댐을 건설해 생긴 인공호수로 안전유원지, 청명유원지, 송포유원지, 산장유원지, 나이아가라 유원지 등을 통틀어 말하며 1969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계곡을 따라서 음식점과 숙박시설 등이 있으며 수상스키, 모터보트,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팔당댐은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 매우 유용한 댐이었다. 1963년 팔당 수력지점 조사가 완료된 후 1966년 6월에 착공해 1973년 12월에 준공했다. 총저수량이 2억4천400만㎥이며, 유역면적 2만3천800㎢, 댐 높이 29m, 댐 길이는 575m다. 발전기는 4대로 3만7천kw의 발전용량으로 시작했으며 총 15문의 수문이 있다. 프랑스의 소프렐렉사(Sofrelec)의 설계이며 국내 최초로 판자모양의 널말뚝(sheet pile)으로 수중공사에서 가물막이 공법을 시도해 토목 기술사에서 중요하다.



농업용에서 시민 안식처로 재탄생한 경기지역 ‘저수지’

농업이 발달했던 경기 지역은 경기 북부와 남부에 저수지가 셀 수 없을 정도다. 이제는 농업이 줄어 유원지, 낚시터, 공원 등 시민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 백운저수지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에 있는 옛 산정리 저수지는 산정호수로 불린다. 산중의 우물과 같은 호수라는 뜻이다. 1925년 조선총독부 농림부의 영북농지개량조합(永北農地改良組合)이 만든 관개용 저수지다. 1977년 3월 30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숙박 및 음식, 유흥 시설이 있는 유원지가 됐다. 북쪽에 명성산과 남쪽에 관음산, 서쪽은 망무봉으로 둘러싸여 산과 물을 보려는 등산객이 찾는 곳이다. 특히 10월 한달동안 산정호수 억새꽃 축제가 열려 왁자지껄하다. 경기 남부에도 저수지가 무척 많다. 구변의 낚시터는 대부분 저수지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953년에 생긴 의왕시 학의동의 백운저수지는 석축 위 흙 제방이며 철제 수문이 남아있다. 역시 인공 저수지로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했으나 의왕에 공장이 들어서고 평촌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유원지로 탈바꿈했다. 시흥시 물왕동에 물왕저수지의 공식 명칭은 흥부저수지이다. 건립당시였던 1945년의 행정구역이 시흥군과 부천군이었으므로 시흥군의 ‘흥(興)’자와 부천군의 ‘부(富)’를 택해 흥부저수지라고 명명했다. 여기는 조성 초기부터 낚시터로 유명해졌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전용 낚시터를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철도와 댐, 저수지를 만드는 일은 건설기술의 발전과 근대 산업화 과정이 녹아있는 대규모 건설 공사였을 것이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 의미가 흐려져 휴식과 레저를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시대를 대표했던 근대산업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댐이나 저수지 주변이 분위기 좋은 환경으로 맛있는 밥이나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거나 낚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내어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현정 건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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