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일선에서 물러나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젊은 시절보다 친구들 간 만남의 횟수는 오히려 잦아진다. 모임은 취미가 비슷한 친구들끼리 또 분화되기 일쑤다. 그중 당구는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지금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자 레크리에이션으로서 인기가 높다. 평소에는 점잖은 친구들이 당구장에선 샷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탄성을 지르거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즐겁고 재미있는 광경이다. 며칠 전엔 테이블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당구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꿈의 물질이란 찬사를 들으며 탄생한 저 공의 재료가 어쩌다 지금은 인류의 골칫거리로 전락해버렸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근 환경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플라스틱의 시초가 다름 아닌 당구공이기 때문이다. 1860년대 미국의 상류사회에서 당구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당시 당구공의 재료인 코끼리 상아가 부족해지자 이를 대체할 물질로 1868년 미국의 인쇄업자 ‘존 웨슬리 하야트’와 ‘파키스’ 형제가 발명한 셀룰로이드가 최초의 플라스틱이다. 그로부터 1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플라스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혹자의 표현대로 인류의 역사를 도구의 기준으로 나눈다면 지금을 석기, 청동기, 철기에 이은 플라스틱기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처럼 미세먼지 없이 맑은 봄날, 제15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플라스틱 차이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했다. 중국은 세계 1위의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국이다. 중국의 왕주량(王久良) 감독이 2016년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한 이 영화는 서울환경영화제를 비롯해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카메라는 전 세계에서 수입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고르고 태우고 녹이며 사는 산둥성 작은 마을 빈민층 가족의 일상을 시종일관 담담히 좇는다. 너무 담담해서 되레 체한 것 마냥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이들은 작업장에서 흘러나온 합성세제 폐수에 오염돼 배를 뒤집고 떠오른 민물고기를 튀겨 먹고, 플라스틱 태운 연기를 온종일 마신다. 일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과 같은 유독물질로 이루어진 치명적인 연기다. 그들이 마시는 물은 또 어떤가. 그 와중에 아이들의 엄마가 의자에 걸터앉아 새 생명을 낳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중국은 올해 초에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정작 중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된 ‘플라스틱 차이나’가 이러한 결정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중국의 재활용 폐기물 금수(禁輸) 조치로 인해 한국도 직격탄을 맞았다. 요즘 ‘환경이 생명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기사를 내고 있는 한 일간지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 1위, 포장용 플라스틱 사용량 2위 국가라 한다. 2016년 통계청 발표 기준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이 98.2kg으로 일본(66.9㎏), 프랑스(73㎏), 미국(97.7㎏)을 제쳤다. 비닐봉지 낭비가 특히 심각하다. 연간 190억 장을 쓴다. 한 사람이 무려 370장을 소비하는 셈이다. 유럽의 경우 많아도 연간 60-70장 수준에 머무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중독에 가깝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뒤로하고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홍수열 소장의 강연이 이어졌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20세기의 선물이라 칭송받던 플라스틱이 이제 ‘인류의 악몽’이 되었다. 썩는데 수백 년이 걸리는데 엄청나게 쌓여만 가니 악몽 그 자체다. 주위에 적잖은 젊은이들이 보이기에 물었더니 연세대 정경대 글로벌행정학 전공 학생들이란다. 수업의 연장으로 온 모양이다. 한 학생에게 소감을 묻자 진지한 얼굴을 하며 ‘바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사용하겠다’고 답한다. ‘나는 쓰레기 없이 산다’의 저자 ‘비 존슨’은 생활 방식의 전환을 통해 스트레스 없이 1년에 1리터 정도의 쓰레기만 배출하며 산다. 물론 개인의 그런 노력에 앞서 생산 방식의 변혁이 더욱 절실하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미래 세대가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발전을 일컫는다. 그것은 개인의 자각과 실천이 없으면 이루기 힘들다. 며칠 숨 좀 쉬며 지냈는데 이내 또 황사가 몰려온단다. 플라스틱 당구공을 보며 환경과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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