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의 일 년 행사 중 마무리를 장식하는 김장철이다.

김장은 이미 태양초를 말리고 정성껏 하나씩 닦는 지난여름부터 시작이 되었다. 마치 숙명처럼 어머니들의 연중행사로 김장은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는 시간 익히기 중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장 중요한 일거리다.

묵직한 김장의 맛을 내기 위해 젓갈의 준비부터 시작한다. 초가을부터 젓갈을 준비하는 어머니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며 젓갈투어라는 이름으로 열차까지 운행하는 강경은 예부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젓갈 산지다. 수도권의 소래포구나 강화도 입구의 대명항도 유명한 젓갈판매 장소다. 처마 밑에 줄줄이 걸어 말리던 육 쪽 마늘의 진가가 발휘되는 시기도 김장철이며 톡 쏘는 맛이 일품인 갓이 알차게 크는 시기도 절묘하게 김장철에 맞춰져있어 시간을 모아 놓은 김장이라는 말이 맞을 듯싶다. 요즘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청각의 시원한 맛 또한 김장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여주는 중요한 재료다. 지렁이처럼 보인다하여 요즘에는 사용을 하는 집이 드문 것 같아 안타깝지만 청각이 내는 그 시원한 바다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미니 수영장만한 빨강 고무 통 몇 개에 그득하게 담겨 절여지는 배추와 싱싱하게 소쿠리에 걸쳐있는 파와 갓, 생강과 마늘 그리고 통통한 여동생의 종아리를 닮은 무와 총각무들이 쌓여있는 풍경은 입맛을 다시게 하는 영화 같은 추억이다. 고춧가루 양념이 묻은 손으로 뚝뚝 배추 속을 끊어 김치 소 쌈을 입에 넣어주는 그 따뜻한 손도 어머니의 손이었으며 눈을 맞추며 간을 묻는 사랑 가득한 얼굴도 어머니의 얼굴이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짓궂은 질문과 농에 바람막이를 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도 어머니의 말소리였다. 산처럼 쌓여있던 절임배추가 반쯤 줄어들 무렵이면 몇 시간째 삶고 있던 커다란 솥에서 뜨거운 김을 뿜으며 등장하는 보쌈에 입맛을 다시던 우리 집의 김장 담그기는 축제였고 행사였으며 잔치였다.

돈으로 귀신도 부린다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 어떤 큰돈도 내게 사줄 수 없는 것이 추억이다. 김치는 살 수 있지만 적어도 내겐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김장은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살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김치를 담그는 것이 아니고 그 김장은 母子간의 대화였으며, 약속이기도 했으며 사랑이기도 했고 추억이라 불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잘 익은 김장김치를 꺼내 먹을 때 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눈빛이 따뜻하다. 김장은 시간이 익고 사랑이 익고 추억이 익어 그 맛의 정점으로 행복을 만들어주는 어머니의 향이며 어머니의 부드러운 가슴이고 어머니가 찍어준 흑백사진이다. 김장에서조차 추억을 만들어준 어머니의 능력에 마냥 행복한 오늘, 주말에 김장을 담근다는 어머니께 전화를 한 통 넣어본다.

자꾸만 짜지는 어머니의 간에 가슴이 아픈 아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지는 까닭이다.

‘ 주말에 보쌈 먹으러 갈께요, 엄마... ’

유현덕 한국캘리그래피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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