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동두천시,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우리의 삶

▲ 보산역 역전풍경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우리의 삶


▶ 그들이 떠난 자리엔 무엇이 남은 걸까.

동두천. 미군기지가 먼저 떠오르는 도시이다. 동두천시 전체 면적의 40퍼센트에 이르는 땅을 미군이 차지하고 있으며, 동두천시의 산업 자체도 미군기지를 대상으로 한 2차산업과 서비스업이 대부분인 기지촌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니 미군기지가 먼저 떠오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테, 미군기지의 이전이 본격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 와서 동두천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휴전선에서 겨우 20km여 떨어진 경기 최북단의 동두천에는 6.25전쟁을 계기로 미군기지들이 이 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1952년 이후 설치된 6개의 미군기지들은 보산동과 광암동, 동두천동, 상패동과 탑동 일대에 자리 잡았고, 캠프 케이시가 위치한 보산동 일대는 동두천시의 도심지로 발전했다. 대형기지인 캠프케이시(보산동)와 캠프호비(광암동)가 차지한 대지의 규모는 2천819만9천644m2에 이르며, 동두천시의 동측일대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동두천시의 시가지는 이 미군기지들과 경사지를 피해 만들어져 미군기지의 남측으로 동두천 천변을 따라 형성되게 되었다. 현재 일부(캠프 짐볼스, 님블)는 반환되었고, 일부(캠프 케이시)는 병력을 줄이긴 하였지만 기지 자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이 곳에 주둔하던 미군들 중 많은 수가 떠나버렸고 이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하던 산업들도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2016년까지 평택기지로 이전을 완료하겠다던 계획은 미루어지고 있어 이 곳의 현재와 미래는 아직도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다.



보산동에 위치한 캠프 케이시 입구


▶ 화려한 그래피티 뒤에 남겨진 옛 영화(榮華).

소요산행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종착역인 소요산역 2개 전 정차역인 보산역이 나온다. 보산역에 내려 만나게 되는 풍경은 상당히 이국적이다. 조용한 가운데 간간히 낯선 외국어들이 들리고, 이제는 다소 빛이 바랜 2층 상가들은 온통 영어로 된 간판들로 덮여 있다. 화려한 타일로 치장된 보산역 앞 상점가들은 지금은 대부분 영업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1층은 상점으로 2층은 주거나 달방으로 사용되던 이 상점들은 역전앞이라는 좋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미군 상대의 영업이기에 현재는 거의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 화려한 타일로 치장된 한 상점 앞에 눈길이 갔다. 시멘트블럭으로 지어진 단순한 형태의 2층 상점 건물. 그러나 파사드 만큼은 최대한 눈에 띄고 화려하게 만들고 싶었는지, 2층 부분은 모서리를 둥글게 하며 안으로 살짝 파여 들어가게 만들기도 하고, 2개의 쌍둥이 건물 중 왼쪽에는 붉은 색, 오른쪽에는 푸른 색의 타일을 붙여 다채로운 색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주인아저씨가 정성스레 써 붙인 ‘달방’이라는 글씨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 문에 붙어 있기도 하여 한 때 많은 이들이 이 곳을 드나들었을 그 시간들을 상상하게 한다.






보산역의 서측으로 가면 좀 더 화려한 풍경의 동두천을 만날 수 있다. 동두천록페스티발이 열리는 한미우호광장 남측부터는 외국인관광특구가 펼쳐지는데 이 곳에는 다양한 이국풍의 음식점들과 술집, 옷가게들과 클럽들이 자리잡고 있어 한 때는 화려하게 빛났을 이 곳의 밤거리를 상상하게 한다. 이 곳의 클럽들에서는 한국 록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신중현씨를 비롯한 다수의 록그룹들이 매일 밤 연주를 하기도 했었고, 미국 뿐 아니라 다국적의 외국인들로부터 서양대중문화가 유입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군들의 유흥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인 혹은 다른 외국인 여성들이 소비되어지고, 희생된 공간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의 이태원, 부천의 신촌 지역이 그러하듯 이 곳의 유흥문화들은 한국 대중문화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고, 이 곳에서 성장한 많은 음악인들은 한국록을 이끌어가는 뮤지션들이 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매해 동두천록페스티발이 열려 동두천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옛 영화도 잠시, 미군이 떠난 이 자리는 열지 않은 상점이, 연 상점보다 많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 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2017년 경기도 미술관에서는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두드림뮤직센터>를 개관하고 상점가의 벽면을 예술로 채우는 그래피티 아트를 실행하였다. 화려한 색채의 벽화들로 재단장한 상점가의 모습만큼 이 곳의 영화(榮華)도 다시 돌아올까? 부디 이 벽화들이 몇 년 후 황량한 거리의 빛바랜 흔적들로 남지 않길 희망해 본다.





▶ 그 곳에 남은 우리의 삶.

보산동에서 남측으로 중앙로를 따라 내려오면 동두천의 도심이라 할 수 있는 생연동을 만나게 된다.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가 끝나자마나 나오는 생연동의 상업 가로들은 보산동의 풍경과는 또 다른 1970-80년대의 익숙한 도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가로수가 늘어선 중앙로의 양 옆으로는 타일장식의 2층 상가들이 줄지어 있으며, 그 뒤편으로는 단층 규모의 개량 한옥들이 다수 분포해 있다. 중간 중간에는 이보다 높은 건물들도 들어서 있지만 이 곳을 채우고 있는 풍경들은 여전히 1-2층 규모의 저층 건물들이다. 이 건물들이 이 곳에 들어선 건 주로 1950년대 후반 이후의 일로 당시 미군기지 설치 이후 동두천시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산동 아랫 동네인 생연동이 주거지로 개발되던 당시였다. 동두천에는 유독 타일장식을 한 건물들이 눈에 많이 보이는데, 이는 1950-60년대 벽돌구조의 건축물에 외장재료를 타일장식을 사용하던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 타일 외장재는 꽤나 고급재료였으니 이 역시 동두천의 옛 영화를 보여주는 듯 하다.






생연동에는 아직도 운영 중인 단관극장도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 되기도 하여 유명세를 탄 이 극장의 이름은 동광극장. 현재는 문화극장의 3관으로 운영중이다. 동광극장은 1959년부터 이 곳에서 운영을 시작하였으니, 올해 58주년을 맞는 극장이다. 영화 포스터가 2층 입면을 가득 메우며, 1층에는 손으로 쓰여진 상영시간표가 부착되어 있는 안쪽으로 오목하게 패인 입구가 있는 이 극장은 1970-80년대 여느 동네의 번화가에 하나씩은 있을 법했던 극장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의 극장들이 대부분 사라짐 지금의 시점에서, 동광극장은 특별한 건 없지만, 그 오래된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관극장이 되었다. 한편 동광극장에서 동광로를 따라 동측으로 쭉 가다보면, 또 하나의 오래된 극장인 문화극장을 만나게 되는데, 이 극장은 5.16 직후였던 196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방문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우의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케네디회관’이다. 이후 문화회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는 문화극장으로 사용중인 이 건물은 지금은 다소 빛바래긴 하였지만, 수직으로 솟은 서측 매스와 건물 외벽의 수직선들로 인해 수직성이 강조되어 보이는 모더니즘 건축물이다. 여전히 이 곳은 동두천의 문화중심으로 최신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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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시의 곳곳에는 여전히 1970-80년대 동네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제 곧 철거를 앞둔 동두천중앙역 부근의 국민주택은 1982년 지어진 6개동으로 이루어진 3층 주택 단지이다. 이 아파트의 가운데에는 한 때는 아이들이 뛰어 놀았을 법한 정원과 골목들이 있다. 또한 이 아파트로 진입하는 길 주변에는 오래된 세탁소가 아직 남아 이 곳에 쌓인 시간들을 보여준다.







동두천은 기지촌으로 성장해왔고, 그로 인한 영화와 아픔이 동시에 공존하였던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는 우리의 삶이 계속되어 왔다. 오래된 집들과 상점들, 남북으로 연속되는 시장들, 여기에는 해방 후 우리 도시가 만들어진 그 과정들이 축적되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의 삶이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군기지가 떠난 이후, 기지촌으로서의 역사를 끝내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동두천에 있어 이 남겨진 시간들과 남겨진 삶들은 그 자체로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이연경 연세대 공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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