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안성시, 시절 따라 멈춰선 정미소… 역사·맥락 이어줄 장소될까

▲ 중앙정미소. 1952년 경 건립된 이곳은 긴 시간동안 다양한 부속시설을 확장해 큰 규모를 자랑하는 산업유산이자 안성의 역사 자체다.


안성은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도시다. 완만한 비봉산이 단단하게 뒤를 받쳐주고 마을 앞으로 둥글게 안성천이 흐른다. 그 바깥으로 황금빛으로 펼쳐진 풍요로운 평야의 풍경. 안성의 첫인상은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발전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상업도시라는 안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근대건축유산을 찾아보았다.



▶ 인성천, 안성역, 안성장, 안성을 부르는 이름들

노랗게 여물어가는 너른 들녘을 지나자 맑은 안성천이 둥글게 도시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안성천은 평택 쪽에서 두텁게 흐르고 안성 시내(과거에는 읍내라고 불렀다) 가까이로 오면 폭도 좁아지고 흐름도 평온해진다. 도심으로 곧장 연결되는 안성대교도 놓여있지만 사람들 기억 속엔 짧고 좁고 오래된 안성교가 더 정다울 것이다. 안성교 주변의 옛 지명은 장기리. 그 시절엔 여기서 안성장이 열렸다. 지금은 농협 근처 중앙시장에서 장이 선다. 취재차 방문했던 때가 추석연휴여서 원도심은 그보다 한 달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더 조용했지만, 시장통은 2일, 7일이면 열리는 안성5일장이 때마침 열려 추석장을 보러나온 사람들이 북적였다.

안성은 견고하게 다져진 산업도시라기보다, 품질 좋은 곡식과 과일이 평야를 채운 농업도시이자,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만드는 물자들이 오갔던 상업도시다. 조선시대 안성장이 번성했던 것은 경기 남부에 위치해 충청과 가깝고 전라와도 그 맥이 닿아있어 삼남에서 올라오는 물자들이 서울로 향하는 관문이었던 까닭이다. 아산만에서 평택, 안성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안성천은 물길과 사람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로였다. 유기전(놋그릇), 혜전(가죽신), 싸전(미곡), 목물전(나무소품), 약방, 우시장 등으로 번성했던 옛 안성장의 기억은 안성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거론된다.

시장통이 사람들로 빽빽했던 시절의 안성장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사라진 안성역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의 사철로 1925년 건설된 천안-안성간의 경기선이 그 시초로 안성에서 죽산, 장호원까지 연결되었다가 태평양전쟁 시기 안성에서 장호원까지 철로가 공출되면서 안성이 종착역이 되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천안까지 도로로 연결되면서 철도는 점차 수요를 잃고 1989년 폐선되었다. 석정동 266번지에 있던 역사도, 철로도 거의 사라졌고 천을 가로지르던 교각의 다리만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역사가 사라진 자리는 도로와 상업건물이 채워지고 철도부지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65년이란 세월 동안 주민의 삶과 함께 했던 안성역은 수많은 사진으로 남아있다. 구산동성당의 주임신부인 공베르 신부도, 정복을 입은 역장도,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도 부산으로, 천안으로, 주변 마을로 가기 위해 안성역을 통과했었다.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은 안성역은 옛 안성장이 섰던 낙원동 골목에 벽화로 재현되어 있다. 이 작은 기억들은 옛 세대에겐 공감을, 지금 세대에겐 전설같은 이야기로 자리잡는다.





▶ 정미소의 꿈, 어디로 가나

안성천변에서 시작되는 구시장길인 성남동과 신흥동 사잇길은 정비가 어느 정도 끝난 상태였다. 2008년 바우덕이 축제 일환으로 옛 안성시장이 번성했던 1960년대, 1970년대를 재현한 것인데, 십여년이 흐르는 사이 간판과 벽화, 상점의 외관이 점점 색을 잃어 오히려 복고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도로를 사구석으로 깔고 주차장을 마련하는 등 분주하다. 그러다보니 도로가 점점 높아져 주변 오래된 상가들의 키가 낮아지는 형국이다. 안성이 번성했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추억과 향수와 관광으로 흐른 것 같아 사업의 목적과 방향성을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길은 특별했다. 주변의 건물들을 상당 부분 예전 그대로 남아있었고, 교차되는 작은 골목 사이로도 옛집들이 많았다. 다른 도시에서도 우시장 근처에서 흔히 보이는 시장형태의 유흥가도 한 블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옛 건물들은 낡은 그대로 여전히 살림집과 상점, 창고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신창정미소와 우전대장간의 발견은 반가웠다. 1955년경으로 추정되는 정미소는 집만큼 오래된 기계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다. 도로변쪽은 입면을 높이 쌓아올려 간판으로 쓰는 간판건축의 외관을 띄고 있으며 내부는 넓게 뚫린 공장 형태다. 정미소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가 훨씬 깊었다. 이제는 정미업도 예전만 못하고 주인도 연로하지만 정미소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한옥 지붕이 낮게 펼쳐진 우전대장간의 주인은 한시도 쉬지 않고 칼을 벼리며 끄떡없는 일념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농기구가 진열된 매대 너머에는 주인 외에는 간파하기 어려운 공간과 사물들이 존재했다. 이 집 역시 안쪽으로 깊게 공간이 펼쳐져있다. 2004년 발간된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에 따르면 이 대장간은 1905년에 지어졌으며 처음부터 대장간으로 사용되었다. 내부를 크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지금까지 대장간을 유지하고 있는 전국 유일의 건물이 아닐까. 우전이라는 이름은 우시장 근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짐작되었다.

구릉과 하천이 발달한 대표적인 평야 지역인 안성에서 정미소는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다. 한때 분주하게 작동했을 수많은 정미소들이 지금은 사라지거나 고요하게 멈춘 채 세월의 뒤쪽에 밀려나있다. 석정동 중앙정미소는 그 뜨거운 시절을 보여주는 건축유산이다. 1952년 경 건립된 중앙정미소는 환기창을 올리고 고창을 낸 층고가 높은 단층건물이며 정미소 본채 외에도 다양한 부속시설이 확장 통합되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단순히 하나의 산업유산으로 볼 게 아니라 안성의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산물이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미소는 녹슬고 무너져가고 있다. 불과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돌아가던 정미소는 어느새 열기를 잃고 빈 집이 되어 바스라져가고 있다. 깊이 잠든 건물이 숨겨둔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정미소들이 더 이상 변형되기 전에 건물의 정확히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하면 어떨까? 중앙정미소가 과거의 역사와 도시의 맥락을 이어주는 기억의 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옛 읍사무소와 소방서, 시민과 함께해온 건축유산

1940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옛 안성읍사무소는 옛 외관을 거의 간직한 채로 안성1동 주민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는 리모델링 되었지만, 붉은 벽돌을 장식적으로 사용한 몸체에 뾰족한 지붕이 얹힌 건물의 외관이 무척 독특하다. 안성군청으로 사용된 적도 있는 이 건물은 고요히 세월을 이겨내고 있었다. 봉남동 의용소방대도 눈에 띄는 건물이다. 화재지역을 살필 수 있도록 망루가 설치된 점이 이 건물의 건축연도를 상당히 과거로 이끌기 때문이다. 두 건물은 정확한 연혁을 밝힌 뒤 특징적인 관공서 건축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안성의 행정적인 역사를 보면 1896년 안성군은 공주부에서 경기부로 개편되었고 1914년 양성, 죽산을 병합하여 규모를 키웠다. 1998년에 안성시로 승격되면서 안성읍이 세 개의 행정동으로 바뀌었다. 현재 안성시의 인구는 안성 1,2,3동을 합해 5만3천여 명, 공도읍이 신도시 개발을 감행하면서 인구가 5만7천여 명으로 늘어 세 행정동의 인구를 넘어섰다. 공도읍의 발전은 인근 평택시의 확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아파트 단지 건설이 가속화되고 대학과 산업시설이 정착되면서 교통이 편리한 공도읍에 인구가 몰린 것이다. 안성시내는 고령화 노후화되고 인구가 줄어드는 반면, 외곽은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에서 자주 보이는 공동화현상이 안성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옛길과 옛 건물들이 남아있고 다양한 시대를 엿볼 수 있는 건물들이 남아있는 이유가 되겠지만, 활력을 잃은 도심은 언제 사라질지 아슬아슬하다. 정미소와 대장간뿐만 아니라 여전히 거리에 존재하는 살림집과 관공서 등 주요한 건물유산의 도면화작업과 관련 인물의자 구술작업 등 근과거를 기록하는 일이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기억을 귀하게 생각하고 담아두는 일이야말로 안성을 찾아올 사람들뿐만 아니라 안성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이 아닐까?

최예선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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