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부평 노동자주택, 시대의 균열을 봉합하는 근대유산으로

기지촌의 기억을 가진 신촌. 


부평은 수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지역이다. 1930년대 말부터 육군조병창과 군수공단이 세워진 후 미 군수지원사령부가 들어와 기지촌을 형성했던 세월은 부평 곳곳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군수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집은 미군 기지촌이 되어 부대노동자들의 삶터가 되었다. 1970~1980년대 수출공단과 대우자동차 등 공장이 세워질 때마다 이방의 삶들이 몰려와 한 시절을 이루고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 부평은 고단했던 노동자의 삶을 기억할 것인가 지울 것인가 갈림길에 서있다.



▶ 부평, 시대의 갈림길에 서다

인천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경기도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도시다. 1981년 직할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된 이후로도 옹진군과 도서지역, 김포 일원 등 경기도 관할의 지역들이 인천광역시로 편입, 확장되었지만, 오랜 삶의 연결고리는 행정구역의 구분을 가뿐히 넘어선다. 경기도 관할 시기 인천의 가장 큰 변화는 공업도시로 다양한 거점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인천의 깊고 다채로운 역사 속에 부평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조선시대 부평은 인천과 별도로 도호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행정구역으로 보면 지금의 인천 부평구, 계양구, 서구와 서울 강서구, 구로구, 경기도 부천시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당시 부평의 중심은 한강과 가까운 계산 일대로 지금의 부평은 변방에 위치한 한촌이었다. 부평은 명백히 근대시기의 도시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지리적 이점으로 경인철도 부평역이 개통된 이후, 1930년대 육군 무기창인 조병창과 군수공단이 설치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나기를 반복했지만 부평은 지금까지도 인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총 54만4천606명/ 2017년 8월 말 통계)

부평을 설명할 때 ‘이주’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일제의 계획에 따라 공장지대가 형성되면서 공장 노동자과 상업 종사자들이 이주해왔고, 조병창 자리를 미 군수지원사령부(ASCOM)가 접수하면서 부대에서 일하려는 노동자들이 부평으로 몰려들었다. 1970년대 미군부대가 오산, 평택 등지로 이동하고 수출공단과 자동차공장 등이 들어서자 다시 노동자의 세대교체가 일어난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이주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평의 역사는 우리 전체 역사의 축소판인 셈이다.

이주의 핵심계층은 노동자들이었다. 부평의 산업 구조에 따라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지만 노동자들이 살았던 집들은 다채로운 흔적을 남기며 부평의 현재를 만들었다. 부평2동의 삼릉사택, 기지촌이었던 부평 3동의 신촌, 산곡동의 영단주택 등 부평의 노동자주택은 삼릉(三菱)의 도시에서 애스컴시티로, 다시 수출공단 도시로 불린 부평의 복잡한 하부구조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근대건축유산이다.



삼릉마을의 옛 사택. 독립된 2호연립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10호연립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 태평양전쟁의 흔적, 삼릉 노동자주택

인천은 공장, 철도, 군사시설, 탄광 등 97개의 태평양전쟁 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19개가 부평에 존재하는데, 대부분 군수공장과 사택의 흔적이다. 군수품 생산 공장인 동시에 강제동원의 역사가 담긴 현장이다. 부평과 백운 사이 철도변 남쪽에 자리 잡은 부평2동 일대는 지금도 미쓰비시의 한자명인 ‘삼릉’이라 불린다. 상점 간판에 삼릉이 명시되어 있는가하면 이른바 ‘삼릉줄사택’이 엄연히 남아있다. 공장은 철거된 후 국군88정비대가 주둔하다가 2002년 부평공원이 조성되었으나, 집은 과거의 흉터처럼 곳곳에 남아 시대의 균열을 증언한다.

삼릉마을의 역사는 1937년, 철도차량과 광산기계를 생산하던 히로나카상공의 공장과 사택에서 출발한다. 조선총독부의 금광개발계획에 힘입어 우량주식회사로 성장한 히로나카는 경성공장을 확장하면서 부평에 제2공장을 설립했다. 부평공장은 근무 노동자의 수만 1천88명. 이들을 수용할 사택과 합숙소, 목욕탕 등의 시설이 공장 주변에 세워졌다. 급격한 사세확장으로 경영손실이 발생하자 일본군수산업의 중심인 미쓰비시중공업이 부평공장을 사들였다. 이 공장은 1942년 미쓰비시제강 부평제조소로 이름을 바꾸고, 방탄강판과 방조강판을 비롯해서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박격포 등 무기류까지 생산해 일본군에 보급했다.

사택과 노동자도 그대로 이어졌다. 1944년까지 이 지역에는 사택 97동, 공원사택 42동, 합숙소와 공동 목욕탕 52동이 있었다. 사택이 계속 지어졌다는 것은 강제동원인원이 점점 더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일본인과 한국인 거주지는 분리되었고 차별되었지만 한옥 사택이 별도로 지어졌다는 점이 독특하다. 지금은 단독사택은 남아있지 않고 2호연립, 5호연립, 10호연립이 일부 남아있다. 이마저도 대부분 비어있어 스산한 폐허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떠나지 못한 입주자들도 있다. 삼릉마을은 최근 새뜰마을사업으로 선정되어 일괄철거가 아닌 주민협의를 바탕으로 점진적인 개선과 개발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부평은 미쓰비시중공업 외에도 조선디젤자동차제조소, 동양자동차공장, 오사카철사공장 등이 줄줄이 세워졌고, 1941년 조병창 공장이 설립되어 총검류 생산을 시작했다. 조병창에 동원된 근로보국대를 비롯, 공장 노동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인구도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이때 인천부가 확장하면서 부평이 부천군에서 인천부로 편입된다. 삼릉사택 인근에는 인천부에서 건설한 부영주택과 철도노동자를 위한 철도사택이 조성되었다. 부영주택에도 한옥평면을 가진 주택과 개량주택이 함께 건설되었으며 1호주택 1동과 한옥주택 4동이 남아있다. 철도사택은 당시 건물 2동이 남아있다.



캠프 마켓 내부의 다양한 연대와 기능의 건물들도 잠재적 근대건축유산이다.
▶ 노동자주택, 세월의 애환을 넘어 정확한 기록으로 남겨야


애스컴은 해체되었지만 보급기지로서 미군기지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2017년 말까지 부평기지를 비우겠다는 계획이 느슨하게 실행중인 상태에서 캠프 마켓은 지난 9월에 해마다 주민을 초청해서 부대의 문을 개방하는 한마당 축제를 열었다. 부평기지는 유난히 주민들 삶터와 가깝다. 근처 아파트 옥상에서 캠프 마켓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2015년 방문 당시 기지는 거의 움직임 없이 고요했다. 이곳은 한때 내국인 노동자 1천여 명이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캠프 내 존재하는 다양한 기능과 연대의 건물들도 잠재적 근대건축유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지촌으로 한때 70~80여 개의 클럽이 성업했던 신촌 일대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다. 부평역사박물관에서 펴낸 ‘이주민의 마을, 부평 신촌’에 실린 주민들 인터뷰를 살펴보면 미군위안부 여성들과 클럽 종사자들에게 당시 신촌은 ‘험한 곳’으로 통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기지촌의 온갖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깨를 맞대고 배고픈 시절을 생존해온 것으로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한때의 뜨거움과 저개발의 서늘한 기억이 공존하는 신촌은 미군기지가 완전히 철수하면 언제든 개발을 향해 나아갈 듯 보인다.

1941년 당시 백마정이라 불리던 산곡동 일대에도 대규모 사택지가 개발되었다. 경인기업주식회사가 1943년 완공한 주택단지는 곧 조선주택영단에 넘겨졌다. 주택영단 역시 별도로 백마정 주택개발을 서둘렀다. 이렇게 형성된 산곡동 영단주택은 부평 노동자주택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조병창 공원, 미군부대 노동자, 공수부대 근무자를 거쳐 한국베아링, 대우자동차 노동자까지 시절에 따라 옷을 바꿔입고 각기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갔던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장, 식당, 미용실, 극장 등 상업시설이 넓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섰다 쇠락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옛 지명인 백마정, 백마장에서 유래한 백마극장은 간판을 달았던 외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수퍼마켓으로 바뀌었다.

산곡동 영단주택은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며 내외부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필지와 도로 등 주택단지의 형태가 과거 그대로 남아있다. 공단 사택의 기능을 충족하도록 기존의 영단주택과 구조와 평면이 다른 점, 온돌과 기와지붕이 있는 한옥주택이 중점적으로 세워졌다는 점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전시상황에서 다급하게 지어진 밀도 높은 노동자주택은 시대의 영화로움을 보여주기는커녕 현실을 감당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산곡동 영단주택의 경우, 개발의 손을 들어주되 원형이 잘 남아있는 주요 건물을 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관으로 보존하자는 의견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잠재적 건축유산의 의미와 가치를 분명히 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정확하게 기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부평역사박물관은 신촌, 삼릉, 산곡동 등 노동자주택이 형성된 지역을 연구하며 전시와 총서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시의 기록에서 주민들의 증언은 중요한 자료다. 당시의 기억을 구술하면서 도시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이 느끼는 도시의 감수성은 도시의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 바로 정체성이다.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생존과 노동이 있으며, 그 둘을 보듬는 집이 있다. 다시, 집이다. 도시를 규정하는 언어와 법칙이 인간다움에서 멀어질 수 없듯이, 집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최예선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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