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광명시, 광명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다.

▲ 광명시청 옥상정원에서 보이는 철산주공아파트 단지
광명시는 1981년 시로 승격한 젊은 도시로, 서울, 부천, 시흥, 안양과 인접하고 있다. 광명하면 1960년대 후반 이후 개발이 이루어진 광명사거리 인근과 철산동 등을 떠올리지만, 사실 광명시가 가진 시간과 공간의 폭은 이보다 넓다. 그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그 시간의 중심지였던 장소들을 살펴보자.


설월리 마을 풍경. 텃밭과 옛집.

▶ 광명의 시작점: 설월리 마을

소하2동 설월리. 원래의 지명은 시흥군 서면 설월리였던 이 곳은 광명의 시작점이 된 곳이다. 구름산 아래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이 시흥군 서면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설월리에 서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 서면공립 보통학교 등의 주요 시설이 설치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968년 광명사거리 주거지가 개발되기 시작하며 광명의 중심은 점차 서울과 맞닿은 북쪽으로 옮겨갔고, 설월리 일대는 1971년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개발이 제한되었다. 그리하여 설월리 일대의 풍경은 1960년대의 그 것에 머무르게 되었다. 1914년경 지도를 보면 구름산(雲山) 동측 아래 소하리(所下里)라는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현재의 소하동 설월리라 할 수 있는데, 그 동편으로는 안양천의 지류가 흐르고 소하리를 중심으로 동서방향의 길과 남북방향의 길이 십자형으로 교차하고 있다. 아쉽게도 하천은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두 길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남북방향의 옛길은 현재의 광명역에서 광명시청을 잇는 오리로이고, 동서방향의 옛길은 설월리와 소하동성당을 잇는 길이다. 설월리에는 1900년을 전후하여 지어진 전통한옥들, 일제강점기 지어진 근대기 한옥들, 1960~70년대 지어진 양옥들 등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개발제한구역이었기에 대부분 단층 혹은 2층의 집들이 대부분이며, 옛 길인 설월로의 양 옆으로 자연스럽게 분포하고 있다. 오래된 동네 슈퍼와 세탁소, 담장 앞 화분들과 집 주변 텃밭들은 이 곳에 멈춰버린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자연 형세에 맞춰 형성된 마을인 설월리의 동북측에는 거의 비슷한 크기의 주택들이 연속적으로 줄을 맞춰 분포하는 계획된 주택단지(설월리 313번지 일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곳은 바로 1970년 생긴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의 직원 기숙사로 건축된 ‘기아의 집(기아주택)’이다. 기아의 집은 대부분 150m2 남짓의 대지 위에 놓인 20평 안팎의 1층 규모의 사택으로, 약 100호의 사택이 오리로 345번길을 중심으로 9개의 블록에 걸쳐 질서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사택들은 대부분 1978-79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평지붕의 단층 양옥 건물이다. 기아의 집이 이 곳에 생기면서 설월리 마을에 비로소 물탱크가 설치되었다고 하니, 설월리마을과 공생의 관계에 있는 곳이다.



▶ 땅속 깊이 새겨진 시간들: 시흥광산, 그리고 광명동굴.



구름산 남서쪽으로는 가학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가학산에는 광명동굴이 위치한다. 현재 광명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광명동굴은 원래 20세기 초 금광으로 개발된 시흥광산이었다. 조선 초기에도 시흥(당시 지명으로는 衿州)은 은(銀)산지로 유명했다고 하나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시흥 광산(始興?山)은 1918년 이이다 노부타로의 인수 이후 이이다시흥광산으로 불렸으며, 금, 은, 동이 주요 광물이었다. 이 광산은 1920년 당시 15,837원의 광산액, 15,926명의 연인원 규모를 지닌 광산이었다.

시흥광산이 그 채굴을 멈춘 건, 1972년의 일이었다. 1961년 노조간부의 집단 해고, 1962년 노동운동 및 직장폐쇄 등 노동문제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면서도, 그 후 10년을 더 운영하였는데 1972년 홍수로 인해 결국 광산을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에는 소래포구 새우젓 저장소 등으로 일부 사용되다가 2011년에 이르러서야 보수,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광명동굴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굴이라 이름이 붙어 있어, 석회동굴 같은 자연동굴을 떠올리기 쉬우나 사실상 이 곳은 근대기 광산노동자들의 피땀이 어린 노동의 현장이었다. 지금의 광명동굴은 당시 사용되던 갱도의 일부(전체 7레벨 중 2레벨만 사용중)이니, 원래 광산의 갱도는 훨씬 더 깊은 땅 속까지(약 275m 깊이) 뻗어 있었다.


동굴의 입구 우측에는 채굴한 광물을 분류하기 위한 선광장이 있으며, 현재 복원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다. 현재의 광명동굴은 관광지화되어 각종 전시 및 체험 프로그램의 장이 되어 있긴 하지만, 동굴 곳곳에는 광산으로 사용될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곳곳으로 뚫려 있는 갱도의 흔적들, 땅 위와 물건을 오르내리던 작은 구멍과 기구의 흔적, 물이 고여 만든 암반수 연못 등을 보노라면, 지금보다 훨씬 어둡고 좁은 통로를 매일 드나들었을, 어두운 조명 하나에 의지하여 오랜 시간 그 안에서 어두움과 폐쇄의 공포와 싸웠을 광부들을 떠올리게 된다. 일제강점기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척박했을 노동여건 속에서 그들이 품고 있는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의 공포는 어떠했을까 사실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광산이었을 당시의 전시물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광명동굴이 좀 더 이 곳에서 광부로 일했을 이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이 곳의 쌓인 시간들을 너무 가벼이 날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 중심의 이동: 광명시청과 철산아파트. 

1968년 광명사거리 부근 지역이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주거지로 개발되었고, 1970년대 구로공단이 본격 가동되면서 광명시의 철산동 일대는 구로공단의 배후 주거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81년 광명시로 승격되며 시흥군에서 독립하였다. 이 시간을 지나며 광명시의 중심은 북측의 광명동과 철산동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시청사와 시민회관이  철산3동에 건립되었다.

광명시청사와 시민회관은 1983년 완공된 것으로, 김수근의 마지막 시기 작업들이다. 3층 높이의 시청사는 각 층의 수평띠가 위로 갈수록 점점 더 돌출되며 강한 수평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1층부분은 붉은 벽돌로 처리된 원형기둥이 열주랑을 형성하고 있다. 열주랑을 이루는 원형기둥의 경우에는 이형벽돌로 수평띠를 형성하여 패턴을 만들고 있으며, 수직적 요소로서의 열주랑과 수평적 요소로서의 각 층의 강한 수평띠는 당시 건축계에서 유행하던 한국 전통 건축의 요소들의 현대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강한 대칭성을 가지는 중앙 출입구를 지나 시청사의 내부는 중정으로 처리되어 있어 빛으로 가득찬 공간을 만들고 있는데, 지금은 중정을 둘러싼 공간들에 시민을 위한 까페나 휴게장소, 옥상정원 등을 실내조경과 함께 조성하여 시청사 외부에서 보이는 다소 권위적인 모습과는 다른 친화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 광명시청 전경
시민회관의 경우 광명시청사보다 조금 더 조형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원기둥이 거대한 크기로 확장되어 전체 매스를 이루는 주요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시청사와 마찬가지로 원기둥은 조각적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철제 수평띠가 이 거대 원기둥들을 엮으면서 건물의 전체 틀을 형성하고 있다. 매스의 거대함과 형태의 단순함으로 인해 다소 기념비적이거나 권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인간 스케일을 잘 표현하는 재료인 벽돌을 사용함으로서 그 거대한 느낌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시민회관 바로 옆에는 시민운동장이 위치하여 시민회관-시민운동장-시민회관으로 이러지며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주말에는 이 모든 공간을 시민에게 열어둠으로써 이 공간들은 관을 위한 공간이 아닌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명시청의 옥상정원에 오르면 북동쪽으로 철산동의 주공아파트들이 보인다. 철산동 주공아파트들은 1980년대 중반 건축된 것으로, 다양한 주택 실험들을 엿볼 수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광명시청의 북측에 위치하는 철산주공8단지의 타운하우스형 저층 주거동들이다. 3층 규모의 이 주거동들은 아파트이지만 타운하우스의 형태를 띄고 있어, 한 세대가 3개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지에도 쿨데삭(Cul-de-sac) 개념을 적용하여 주거동 앞은 막다른 도로로 처리하고 있으며, 각 세대는 외부 정원과 직접 맞닿아 있다. 이 곳에서는 30여년의 시간을 지나며 각자의 취향에 맞게 문도 새로 달고, 집 앞 정원도 각자 꾸며둔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조만간 재건축에 들어갈 예정인 지역이지만, 1980년대 중반 공동주택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광명시는 100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시흥 서면의 중심지로서, 주요 광물의 산지로서, 서울의 배후주거지로서 역할을 해오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광명역세권 개발과 철산주공아파트 재개발로 광명의 또 한 번의 급격한 변화가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광명의 100년을 돌아보며 기억을 남겨본다. 그 시간의 켜는 결코 얕지 않기에, 그 시간을 기억하고 기록하길 기대해 본다.


이연경 연세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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