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 올랐던 남재(南在, 1351~1419)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282-7에 있다. 이곳은 십여 년 전만 해도 먹골배로 유명했던 시골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여기로 오려면 육군사관학교·서울여대·태릉선수촌·삼육대학교를 지나 화접초등학교를 찾아야 했는데 주변이 모두 배밭이었다. 먹골배는 색깔이 곱고 당도가 높았다. 모래가 섞인 사질토양과 낮과 밤의 큰 일교차 덕분이다. 일교차가 크다는 것은 자연환경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먹골배는 왕실에 진상되고 해외로 수출되는 명품이었다. 그러나 이제 도시화로 먹골배의 명성은 사라졌다. 개발은 필요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잃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남씨의 시조는 중국 당나라 여남 사람 남민이다. 안렴사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는 신라의 산수와 인심에 반하여 살기를 원했다. 그러자 신라 경덕왕은 여남에서 왔다하여 ‘남’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영양을 식읍으로 삼게 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그의 후손 중 3형제가 있었는데 맏형 홍보는 영양에서, 둘째 군보는 의령에서, 셋째 광보는 고성에서 정착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씨의 본관이 3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중 의령남씨가 인구수가 가장 많고 번창하였다. 거기에는 당연히 풍수가 있다. 특히 남재·남경문·남지로 이어지는 3대 묘들은 장소는 다르지만 모두 명혈에 자리고 잡고 있다.

남재 묘가 이곳에 자리하게 된 데는 이성계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본래 이 자리는 이성계가 죽으면 묻힐 곳이었다. 반면 남재가 자신의 묘로 미리 점찍어 놓은 곳은 지금의 이성계가 묻혀 있는 건원릉 자리였다. 두 사람의 묘 자리가 바뀐 사연은 다음과 같다. 태조가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권력다툼을 보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무학이 간곡히 설득하여 자신이 주지로 있는 양주 회암사에 머물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재가 회암사를 찾았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이들은 모두 친구사이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죽은 후 묻힐 묘 자리를 서로 구경하기로 했다.

지금의 남재 묘 자리인 이성계의 자리를 먼저 구경하고, 앞산 건너편에 있는 남재 묘 자리를 구경했다. 땅을 볼 줄 아는 이성계는 자리가 좋다며 연신 칭찬하는 것이었다. 남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좋으면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대신 “자고로 왕의 능 자리에 묘를 쓰면 후대에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며 뒷일을 걱정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 “만일 역적이 나오더라도 당사자만 문제 삼아라”는 유훈을 남기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에 따라 후일 남이 장군이 역모로 몰려 삼족을 멸할 수 있었으나 남이만 처벌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곳의 주산은 문필로 우뚝 솟은 불암산(508m)이다. 그 위로는 한북정맥 용암산에서 갈라져 나온 수락산(638m)이 있다. 불암산 주봉은 통 바위로 기가 매우 세다. 그 모습이 여승이 머리에 쓰는 송낙처럼 생겼다하여 부처바위로 불리게 된데서 불암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불암산 중심에서 내려온 맥이 삼각형 모양의 산을 만들었는데 매우 순화되어 산세가 부드럽다. 남재 묘에서 보면 바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뒷산은 바위산인데 그 바로 아래가 흙산이면 이를 박환(剝換)이라고 한다. 허물을 벗고 순화된다는 뜻으로, 박환이 잘된 맥에서 혈을 맺는다. 이곳은 박환의 교과서 같은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환된 산 중심에서 평지를 향해 내려온 맥이 다시 초승달 또는 미인의 눈썹처럼 생긴 아미사를 만들었다, 더욱 작고 순화된 산이다. 그 후 맥은 평지로 행룡하는데 소위 말하는 논두렁맥이다. 예전에는 불암산에서 내려온 용이 몸통을 좌우로 흔들며 들판을 헤엄쳐 건너오는 모습처럼 보였다. 지금은 개발로 그 흔적이 다 훼손되어 아쉽다. 용이 덕송천을 만나 멈추어 기를 모은 평지 돌혈이다. 야산처럼 생긴 혈장은 둥글어 목탁처럼 생겼다. 주산인 불암산을 부처님으로 본다면 노승예불형이다. 노승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는 형상이란 뜻이다.

혈장 맨 위는 부친인 남을번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남재의 묘가 있다. 남재의 아들 남경문의 묘는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있는데 이 또한 명혈이다. 남경문의 장남 남지는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묘는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데 명혈이다. 이들 후손들 중 정승 6명, 대제학 7명, 판서 24명을 배출하여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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