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휴정협정을 체결한지 64년이 흘렀다.

과거 일제 식민지 치하와 6.25전쟁은 한반도 곳곳에 깊은 역사적 생채기를 남겼다.

민족 분단과 폐허가 된 국토, 그 위에서 대한민국은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동안 숱한 위기를 관통하며 살기위해 몸부림쳐왔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군사강국이자 세계 12위의 경제대국, ‘한류’로 아시아를 선도하는 문화강국, 그리고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몇 안 되는 ‘민주공화국’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 잡게 됐다.

이 위대한 역사에는 그 무엇보다 조국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다시는 우리의 소중한 가족이 타인에 의해 짓밟히지 않게 하리라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

나의 조부 고(故) 박성룡 예비역 대령 역시 그러한 뜻을 가진 분들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광복 후 미국에서 유학중이었던 박성룡 대령은 6.25 전쟁이 터지자 모든 것을 버리고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GHQ)로 지원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1953년 공군 소령으로 현지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했고 1964년 10월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약 12년 간 다시는 대한민국 영공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조국 영공 수호를 위해 심신을 모두 바쳤다.

나의 부친 역시 조부의 뜻을 받들어 공군에 몸을 던졌다. 1978년 공사 26기로 임관해 지난 2009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32년간 대한민국 자주공군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분골쇄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에도 한국교통대학교에서 교수로 역임하며 ROTC 공군 후배들에게 공군의 자부심을 일깨우는 데 힘쓰고 있다.

몇 해 전에는 필자까지 대한민국 공군에 복무하게 됨으로써 우리 가족사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당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던 나는 UC산타바바라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후 대학원 진학을 앞뒀었지만, 대한민국 공군에 헌신했던 조부와 부친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고국으로 들어와 자랑스러운 공군 장병이 되는 길에 들어섰다.

또한, 우리 집의 장손이자 나의 형인 박재완 예비역 중위 역시 비록 공군은 아니지만 해병대 사관후보생 109기로 임관해 대한민국 국군의 간성(干城)의 막중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지난 7월 우리 3대가 경기도의 병역명문가로 선정됐다. 조부와 부친은 물론 나와 형까지 모두 현역복무를 성실히 마친 이유에서다. 감회가 남달랐다. 우리 가족이 이처럼 병역의 의무를 신성하게 받든 것은 꼭 누가 알아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가끔 매스미디어를 보면 병역이행을 피하려 ‘꼼수’를 부리다 적발된 사람들의 뉴스가 나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한다. 심지어는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연예인은 물론,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할 정치·경제계 인사들까지 입방아에 오를 때면 ‘국방의 의무’가 가진 무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곤 한다.

부친이 경기도로부터 감사패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며 하신 말이 문뜩 떠오른다. “알아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앞으로 명예롭게 병역을 수행한 사람들이 더 존경을 받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처럼 국방의 의무가 가진 무게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 땅의 평화가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굳이 국가가 나서 ‘병역 명문가’를 선정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길 기원한다.

박재현 예비역 공군 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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