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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능행차 완전하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2017년 09월 12일(화)
최종수
정조대왕 능행 차 완전하다고 말하기는 이르다./한국효문화센터 최종수 이사장

올해는 정조대왕의 능행차가 완벽하게 재현하게 된다고 한다. 행사를 기대하며 222년을 지나며 치러지는 능행 차의 의미를 되돌아보게한다.

지난달 서울시와 수원시, 화성시가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9월 23, 24 양일간에 걸쳐 창덕궁을 출발해 시흥행궁을 거쳐 수원 화성행궁과 화성 융릉구간을 지나는 능행차를 재현하는 대국민 행사라고 한다.

2017년 9월1일자 중부일보 사설에는 1976년 제13회 화흥문화제에 처음 재현된 후 1996년 수원 화성문화재부터 내실 있는 모습을 갖췄음에도 완전하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한다.

사도세자의 묘소인 화성 융릉까지 가지 못해 반쪽짜리 행사라는 지적과 함께 정조대왕 행사를 따로 거행해온 수원과 화성이 이번 능행차를 계기로 형제도시가 화해했다는 내용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대왕의 총 12차의 현릉원 전배 중 6회를 지나가신 과천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제외 된 것을 보면 아직도 반쪽짜리로 완전하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과천시민들은 남태령에서 격쟁이라도 해야 될까 싶다.

정조대왕은 1776년 왕위에 오른 후 1789년 영우원에 있던 부친사도세자의 묘를 천년의 명당이라는 화산으로 옮기고 그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 지었다.

정조는 평생을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부친의 능침을 현륭원으로 이장하고 이틀이나 걸리는능행길을 오가며 효를실천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했던 총 12차례의 현릉원 전배 길에는 1차에서 5차까지와 11차의 하행 길 등 총 6번에걸쳐 과천을 지나셨다고 승정원 일지에 기록되어있다.

또한 정조임금의 현륭원 전배의 기반이 되는 원행정례(園行定例)에는 사당리- 남태령- 과천현행궁-냉정점-인덕원점후천교를 지나는것이 언급되어 있다.

1790년 1차 거동 길에 과천 현에 머무른 정조는 과천현의 동헌을 부림헌, 서헌인 객사를 온온사(穩穩舍)라 명하고 친히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현재 온온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정조의 제2차 전배인 정조 15년(1791)부터 4차 5차에 과천을 지나실 적 과천의 백성들이 왕의 효심을 위로하고자 베풀었던 춤과 소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4호 과천무동답교놀이로 지정되어 있다.

“대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락민들이 화려한 복색의 미동을 꾸며서 무동극으로 능행 시에 환영과 환송을 거듭하니 대왕이 즐기시고 기뻐하셨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과천의 무동답교놀이는 정조의 능행의 큰 의미. 즉,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놀아졌다는 것이 특징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추앙해야 할 효행이 전통연희로서 과천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강남쪽 청계산 북쪽에 과천현관사가 있다. 관사 북쪽에는 큰길이 산위로 나있는데 이름이 여우고개다”로 시작되는 1622년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이 있다.

정조임금이 화성 능행 차 시 한강을 건너 남쪽에 큰 고개에서 쉬어가게 되는데 “고개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하문하니 아전이 남태령이라 아뢰었다.

후에 이 고개가 여우고개인 것을 알게 되어 거짓말을 한 죄를 묻자 아전은“왕께 어찌 여우라는 요망한 짐승을 아뢰겠나이까.

그래서 한양 남쪽 제일 큰 고개라 남태령(南泰嶺)이라고 아뢰었나이다”라고 고하니 대왕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죄를 묻지 않았고 그때부터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과천의 가자우물은 정조 능행 차 시 “갈현에 우물 맛이 좋다”하여 우물에 벼슬을 내려 품계를 제수했다는 일화가 전해오며 찬우물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렇듯 과천은 정조대왕과 관련된 다양한 유적과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정조대왕의 효행정신 역시 과천의 자랑거리로 시민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정조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 한다.

정조가 능행을 통해 진정으로 시행하고자 했던 건 백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나라의 발전을 찾는 길이었다.

정조의 능행 중에만 상언과 격쟁 3천355건이 진행됐고 정조는 환궁해 조처를 취했다.

선대왕에 대한 참배를 위한 단순한 행차가 아닌 백성들을 위한 행차였던 것이다. 백성들은 국왕을 만나기 위해 능행차길에 참여했고 억울함이 풀려지는 기쁨과 나라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님에 대한 작은 충성심을 새겼을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파악하고 사기를 북돋아주고 갈등과 해결하고 화합에 주안점을 뒀다.

우리는 정조대왕 능행차가 원형 복원이란 박물관식의 복원이 아닌 옛것 속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부단히 되살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기를 바란다.

정조가 구하고자 했던 시대의 정신에 부각하여 누구하나라도 소외됨이 없이 억울함 없이 소통하고 화합으로 능행 차의 올바른 재현이 되기를 바란다.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