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경기도민의 삶 (26)구술사로 읽는 피란민 이야기

▶ 피란민의 대표적인 정착지, 경기도

6·25 전쟁으로 국민들은 크게 2차례의 피란을 경험 하였다. 1차 피란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다. 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했고, 38선 인근 주민과 서울·경기 지역의 민간인들은 피란을 떠나야 했다. 대규모 피란 행렬이 대구, 부산 등을 향해 이동했다. 그 후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UN 연합군이 수세에 몰렸고, 북한의 민간인들이 남쪽으로 대거 넘어왔다. 2차 피란은 1·4 후퇴로 서울과 이남 지역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피란하면서 발생했다. 주로 이북과 서울·경기·충청 지역 주민의 대규모 피란이었다.

피란민의 수는 1차 피란 당시 약 150만 명, 2차 피란기에 약 48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1차 피란민은 주로 남한 사람들로 1950년 9월 28일 UN 연합군의 서울 수복으로 인한 정부의 귀환 정책에 의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반면 2차 피란민은 남한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38선 이북 지역의 주민까지 포함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잠시 전쟁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경기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전쟁은 장기화되다가, 결국 휴전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들 중 많은 수가 경기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196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 내 북한 피란민의 20.4%가 경기도에 뿌리를 내렸다.

“내가 평생을 어머니한테 멸치 꽁다리 하나를 못 해드렸어.(울음) 멸치 꽁다리 하나 못해준 자식이 자식이야?”

전쟁이 나던 해 겨울, 피란을 떠났던 김종기(가명·1923년 함경북도 출생, 성남거주)씨도 한 일주일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모두 북에 남고, 동생과 김종기씨 둘 만 내려왔다. 서걱거리는 찬바람을 뚫고 피란을 떠났던 그 날, 멀리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배웅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김종기씨는 금방 다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 많은 세월은 무심히도 흘렀다. 이제 아들은 그때의 어미보다 훨씬 더 늙어 버렸다.

 ▶ 경기도와 서울일대에서 갇힌 피란민

한때 피란민들은 경기도와 서울 일대에서 발이 묶이기도 했다. 1.4 후퇴 며칠 뒤인 1월 11일 주한미대사관의 드럼라이트(Everett F.Drumright) 서기관은 당시 피란 상황을 미 국무부에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유엔군이 사수하지 못하고 서울의 90km 이남지역인 평택으로 퇴각하게 되자, 피란민은 갇힌 신세가 되었다. ······먼저 유엔군은 적이 피란민으로 가장하여 침투할 것을 우려하여 남부전선 내로의 진입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서부전선의 중국군은 그들을 피해 달아났던 피란민들을 북쪽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고 있다.’

실제로 그즈음 피란길에 올랐던 송수철(가명·1935 평양출신, 오산거주)씨도 ‘고립’을 경험했다. 16살 소년이었던 송수철씨는 1950년 12월 피란길에 나섰다. 한 달 여 간의 갖은 고생 끝에 임진강에 도착했다. 그러나 임진강은 막혀있었다. 유엔군이 피란민 못 건너오게 막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임진강 옆 시골마을에 머무르는데 인민군이 갑자기 마을로 들어왔다. 인민군은 총부리를 들이대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검사했다. ‘이제 죽는 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인민군은 내일 아침 일찍 차를 보내 고향에 보내주겠다고 하며 빈집에 머물라고 했다. 그날 밤 임진강의 길이 열렸다는 소문이 들렸다. 당시에는 소문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빠른 소식 전달 수단이었다. 송수철씨와 일행은 목숨을 걸고 빈집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임진강으로 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천신만고 끝에 강을 건넜다.

▶ 거대한 피란촌이 형성되었던 경기도

당시 경기도에는 약 55개의 피란민 수용소가 있었고, 피란민 수만 해도 총 14만 5051명에 이르렀다. 경기도의 남쪽에는 서울 피란민과 북한에서 온 피란민(월남민) 그리고 경기도 내 피란민이 몰려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다. 전쟁 시기 경기도 피란민 수는 1951년 5월에 160만 명가량이었다가 1952년 4월에는 70만 명, 그해 9월에 85만 명 그리고 1953년 9월에 90만 명가량이었다. 경기도 피란민 수는 전쟁동안 70만 명에서 160만 명으로 늘어났다. 주목할 점은 휴전회담 뒤에도 이 숫자의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반면 부산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1952년 4월 무렵 피란민의 수가 뚜렷하게 감소한다. 다시 고향으로 귀향한 것이다. 반면 경기도에서는 많은 수가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정착했다.

“수원 역전에 내려가서 저그 아버지(남편)을 만났어요. 저그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니라 친구들도 있고, 아이고 세상에. 친정 식구들도 다 여기 있는 거예요.”

철원에서 태어난 이희자(가명·1932년 철원출생, 수원거주)씨는 피란 과정에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피란 열차를 타고 김천까지 내려갔던 이희자씨는 수소문 끝에 남편이 수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렵게 수원으로 와보니 그곳에는 이미 거대한 피란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희자씨는 그곳에서 남편은 물론 폭탄을 맞고 거동이 불편했던 친정어머니를 포함해 헤어진 가족 친지들을 다 만난다. 제2의 고향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이희자씨는 ‘움막집을 짓고, 배급 쌀을 타다 먹고 광교산에 가서 나무를 해대며 얼기설기 살’았다. ‘몸빼 하나만 입고 (찢어진 바지를 수선할) 헝겊쪼가리가 하나 없어서, 벌렁벌렁 창피하게 나무를 하러’ 다녔다.

▶ 강한 삶의 의지로 이겨낸 고된 정착기

전쟁으로 갑자기 삶의 뿌리가 뽑혀 타향에 던져진 피란민들의 삶이 녹록 했을 리 없다. 광활한 황무지와 간석지가 많아 피란민 정착에 유리했던 평택에도 정부주도로 난민 정착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초기 피란민들은 갖은 고초를 겪었다.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돌았고, 식량도 늘 부족했다. 간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성공해도 곧바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먹고 살게 없었다. 토착민들의 괄시와 차별도 성행했다. 당시 피란민들에게는 ‘삼팔따라지’는 별명이 붙었다. ‘삼팔따라지’란 원래 노름판의 용어로 3과 8을 합해서 생긴 한 끗으로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제일 낮은 패를 두고 이름이었다. 이에 빗대어 피란민들에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빈털터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내부에는 누구보다 강한 삶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열이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학력이 어떤 재산보다도 안전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50년대의 교육열은 ‘교육 기적’, ‘교육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뜨거웠고, 그 중에서도 38선을 넘어온 피란민들의 교육열은 눈에 띄게 높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피란민들의 구술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자식 공부’다.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나...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어. 아이들을 무식하게 만들면 그 죄를 어떻게 하나. 그게 내 죄 거든. 제대로 못 기리고, 교육 못 시킬까봐. 지들이 하고 싶어하는 공부 못 시킬까봐. 그게 고민이었어.” - 박옥이(가명·1921년 황해도 출생, 수원거주)

“애들 공부시켜야 하니까...내가 출퇴근만 왕복 4시간을 했어요. 그래도 별 수 있나. 애들이 한창 공부할 때인데...이사 갈 수는 없잖아요.” - 송수철(가명/1935 평양출신, 오산거주)

▶ 실향민들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는 경기도의 역사

6.25전쟁으로 경기도 일대에는 거대한 피란촌이 형성되었다. 휴전 후,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 피란촌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경기도 일대에 뿌리를 내렸고, 강한 삶의 의지로 ‘살아냈다’. 그렇기에 경기도에서 살아온 실향민의 삶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선다. 그들이 걸어온 삶의 역사가 곧 경기도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다. 그러나 그 생생한 역사를 듣고 기록 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하루라도 빨리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은정아 방송작가, 구술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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