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23)경기도 근대교육에서 미래를 생각하자

▲ 인천내리교회
▶ 개항장에서 변화가 시작되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은둔국’ 조선은 ‘세계화’로 진입하는 과정을 맞았다. 물론 우리의 소망과 달리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말았다. 생소한 조계지는 외세침략의 ‘최전선’이 되었다. 자국 이익만을 위한 숨 막히는 치열한 생존경쟁 현장은 바로 조계지였다. 통상거주와 치외법권을 인정받은 이들은 마음대로 저들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아무런 저지도 없이 일사천리로. 항구적인 침탈기반은 항만정비·철도부설·금융기관 설치·통신망 구축 등등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학교조합이나 민단 등 자치기구를 운영하였다. 서구열강과 통상으로 외국인들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이들은 한국인을 ‘미개인·야만인’으로 인식하는 등 우월감을 드러내었다. 근대문물의 시혜자로서 군림하며 즐겼다. 외국인에 대한 불신감이나 의혹 증폭은 여기에 찾아진다.



▶ 일상사 변화를 알리다

의료사업과 근대교육 시행은 선교사업의 우선적인 활동영역이다. 인식 변화와 더불어 외국인에 대한 불신감을 점차 완화되었다. 자연스럽게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 등은 근대교육 산실로서 발전을 거듭한다. 수도 관문인 경기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예외적이지 않았다.

‘절대자’라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 만민평등은 신분제 질곡에서 신음하던 민중에게 안식처로서 다가온다. 특히 교회는 여성들에게 외부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출구’였다. 천지개벽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일상사 변화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출발점이자 신호탄이 되었다. 가치관이나 인식 변화와 더불어!!



▶ 민지계발을 위한 계몽활동이 병행되다

외국과 교류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통역관 양성이 급선무였다. 근대문물 상징인 ‘학교’가 탄생하는 극적인 순간을 맞았다.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각종 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된다. 과거제 폐지는 근대교육 시행에 ‘획기적인’ 이정표였다. '흥학조칙'에 의한 교육입국론과 함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독립협회 지회이자 자매단체인 박문협회(博文協會)는 인천에서 조직된다. 1898년 6월 9일이다. 회원은 100여 명에 달하는 등 대단한 열기였다. 토론회·강연회 개최와 근대교육 보급 등을 통한 문명사회 건설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회관 내에 각종 신문·서적을 두루 완비하는 등 회원들의 지식배양과 정보제공에 관심을 보였다.



▲ 1902년 설립된 삼일여학당은 수원을 대표하는 근대교육기관이었다. 기독교 전래와 함께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다.
▶ 여성교육이 태동하다

경기도내 최초 근대교육기관은 1892년 1월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 내에 설립한 영화여학당(현 영화초등학교 전신)이다. 설립자인 존스 목사 부인은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 착수한다. 초기에는 응모자조차 없을 정도로 냉담했다. 교세 확장과 인식 변화는 분위기 반전으로 이어졌다. 교수방법은 철저한 암기식 위주로 진행되었다. 남편도 영화학교(일명 영화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동참한다. 학교 임원진을 중심으로 한 계몽활동은 주민들 자아를 각성시켰다.

삼일여학당은 수원을 대표하는 근대교육기관이다. 이는 기독교 전래와 함께 1902년 설립되어 신문화운동을 주도한다. 교사인 김몌례(金袂禮)는 지식뿐만 아니라 시세변화에 부응할 수 있는 인격수양 등을 강조했다. 강연회는 가정교육 중요성을 학부형들에게 인식시키는 촉매제였다. 사회적인 지도자로서 그녀에 대한 존경심은 학교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 사회적인 책무를 일깨우다

변화에 둔감한 경기인은 아니다.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근대교육 시행은 이를 반증한다. ‘근대교육=시무책=사회적인 책무’로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인천을 대표하는 사립영어학교는 교육생들 편의 도모와 향학열을 위하여 야학으로 운영한다. 수제학교(일명 박문학교)·제령학교(濟寧學校)도 설립되는 등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삼일남학교는 수원지역 선교사와 신자 등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주요 발기인은 삼일여학당을 주도한 이하영·임면수·나중석 등이다. 주민들 의연금은 교육내실화를 도모하는 주춧돌이 된다. 화성지역 최초 사립학교는 1899년 홍승한이 설립한 사립무관학교였다.

강화도는 목사 존스와 박능일 등 협력으로 잠두의숙에서 근대교육이 시작된다. 교과과정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다만 근대교육 시행으로 주민들에게 자아각성과 사회적인 책무를 일깨운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 이동휘

육영학원(보창학교 전신)은 1904년 이동휘와 유경근·윤명삼 등이 주도한다. 목적은 군인 자제와 일반 자제를 구국간성으로 양성이다. 교과목은 본국지리·역사, 외국지리·역사, 국문·산술·영어·일어 등등. 조희일과 김만식은 각각 일어와 영어 명예교사로서 열성을 다한다. 교과과정은 소학·보통과인 초등교육과 영어·일어과인 중등교육으로 구분·운영했다. 강화도는 물론 서북지역 100여 개교에 달하는 지교 운영은 교육구국운동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지렛대였다.



▲ 김정혜
개성 여성교육기관인 표상인 정화여학교 설립자는 김정혜이다. 열성적인 교육활동에 감복한 여성들은 평생 어렵게 모은 재산을 학교재단에 흔쾌히 기부했다. 지식인들은 명예교사로서 자원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화여학교가 전 국민적인 관심 속에서 교육내실화를 거듭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특히 스코필드나 조선여자교육협회와 교류는 외부 세계와 소통으로 교육내실화를 도모한다. 개성군사회장으로 치룬 장례식은 중앙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학교는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적인 기능과 아울러 타인을 인정하는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 구심체였다.



▶ 의무교육론, 교육구국운동으로 견인하다

러일전쟁 발발을 전후로 국망(國亡)에 대한 위기의식이 증폭된다. 교육구국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시기를 맞는다. 군단위로 시행된 의무교육은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웅책 중 하나다. 이동휘 주도로 조직된 강화학무회를 당시 분위기를 보여준다. 의무교육 실시에 대한 의지와 주민들 열의는 대단한 기세였다. 운영비는 생활정도에 따른 ‘의무교육비’와 유지층 의연금으로 충당되었다.

개성교육총회도 ·취지서·를 통해 계몽활동의 지속적인 추진을 밝힌다. 관내 향학열을 고취시키는 가운데 연합대운동회는 근대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운동회는 지역민을 위한 화합의 장소이자 존재감을 인식하는 생활현장이다. ‘근대교육=국권수호’이자 국민적인 의무로서 성큼 다가온다.

의무교육은 국권회복을 위한 치밀한 계획의 일환이다. ‘공공성’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배태되는 동시에 실천력을 배가시킨다. 개신교·성공회 등 외래종교의 강화도에서 토착화는 전통과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주민들 자발적인 참여를 견인하는 요인이 된다.

근대교육은 이들에게 최소한 ‘사회적인’ 책무이다. 포천군·용인군·김포군 등지 유생들은 의무교육 시행을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포천군 신문구람소 운영과 신야신숙을 설립한 유지들은 청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청성제1·2·3학교 설립은 의무교육 일환에서 비롯된다.

광주군 초월면 유지들도 의무교육 시행을 결의한다. 의무금은 호당 15전씩 배당하는 등 ‘면립학교(面立學校)’ 설립에 노력했다. 이를 기점으로 사립학교 설립은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관내 한산·광성·광흥·수서·궐리학교 등은 변화를 상징한다.

교하군수 윤기섭은 선성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교육을 의무로서 인식할 만큼 빈번한 강연회 개최는 주민들을 각성시켰다. 부임 이래 관내에 설립·운영된 사립학교는 13개교에 달한다. 파주군에도 ‘신문잡지종람소 취지서’를 발표하는 등 기반 조성에 앞장섰다.

근로청소년을 위한 새로운 배움터로서 야학이 탄생한다. 교육시설이나 교재 등은 미비하였으나 향학열은 대단했다. 한글이나 역사·지리 교육 등은 민족의식과 국가정신을 일깨웠다. 관내 학교를 망라한 연합운동회는 소통에 의한 신뢰감을 구축하는 생활현장이다. 마침내 지배층 전유물인 교육수혜도 민중층이 향유하기에 이른다.



▶ 소통현장으로 갈등을 치유하다

도내 유림들도 이러한 변화에 무심하지 않았다. 향교답을 기반으로 설립된 ‘명륜학교’는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근대교육은 문명사회 건설을 위한 지름길이자 국권수호를 위한 최소한 책무였다. 우후죽순처럼 사립학교설립은 들불처럼 확산된다. 어느 누가 이러한 변화를 감히 예견할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경기도 항일투쟁은 근대교육이 밑거름이었다. 자신의 안일보다 사회적인 책무를 다하려 심화된 인식은 에너지원이다. 소통에 의한 화합과 상호공존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징검다리가 된다. 교육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이다. 다문화시대에 부응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교육에서 모색하자.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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