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염원하는 과거와 미래의 결절점 (19)파주의 멈춰진 시간속 분단의 흔적

▲ 교각만 남아있는 독개다리
한국전쟁이 난 지 60년이 되던 2010년 새해 아침. 파주는 평화시민헌장을 제정해 공표하고 파주가 평화도시임을 내외에 선언한다. 전쟁의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 중 하나로 아직도 분단국 접경도시인 파주 곳곳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파주는 과거의 남한 땅 북쪽 끝이 아닌, 통일의 전진기지로서 대륙과 유라시아로 가는 기점이다. 또 파주 DMZ는 생태계의 보고이자 세계 평화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하고자 평화도시를 선언한 것이다. 냉전시대 안보를 내세우던 때는 지나가고 휴전선 주변으로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형 행사들이 자주 열리는 것을 감안하면, 21세기 파주는 통일을 준비하는 남한의 최전선에 위치한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지금의 명칭을 얻은 파주는 1914년 교하군과 1945년 연천군 적성·남면을 편입했고 1946년 다시 남면을 양주군으로 이관했다. 1996년에 군에서 시로 승격돼 현재는 서울시와 안양시를 합한 크기의 면적에 농촌, 산업지역, 신도시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아직 분단의 상처가 남아있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헤이리와 출판도시, 대형 아울렛 매장이 있는 도시로 보일 수 있다. 한강의 북부간선도로는 자유로로 이어지고 파주의 남쪽과 서쪽 외곽을 따라 임진각까지 자동차를 타고 쉽게 가볼 수 있는 지역이 됐다.

파주의 중심을 지나가는 것은 자동차 도로가 아닌 경의선 철도다. 경의선은 1902년 기공됐으나 외국자본에 이어 대한제국 정부가 철도부설을 추진해 서울~개성간 선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군용철도 부설을 시작, 대륙침략노선으로 이용하게된다. 1905년 평양-신의주 구간이 완공돼 용산~신의주 구간에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서울역을 기점으로 신촌을 지나, 가좌에서 합류하는 선로가 개통됐다.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도 열차는 계속 운행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문산-개성 운행이 중단되고 남북간 철도는 끊기게 됐다.

파주의 근대문화유산을 찾아가기 위해 경의선에 올랐다. 지금은 전철로 연결돼 파주로 진입하는 전철역 주변으로는 대규모 택지들이 들어섰으며 이미 많은 인구가 서울까지 출퇴근하고 있다. 지금은 경의선이 중앙선과 연결돼 대부분의 전철이 용산을 거쳐 한강 북쪽을 따라 경기도 동부로 넘어가고 있지만, 가좌에서 분리돼 신촌역을 지나 서울역 서부 방면이 종착인 열차도 운행되며 파주와 서울간 통근수단으로써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004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목록화보고서를 살펴보면, 경기대 안창모 교수팀이 파주시의 조사를 맡았고, 휴전선에 인접한 파주시의 근대문화유산은 관공서와 교량, 전쟁과 관련된 기념 조형물 등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사보고서를 참고해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옛 금촌역은 사라지고, 신역사로 바뀌었다.

사라진 옛 금촌역

파주시에 도착한 곳은 금촌역. 이 곳은 일제강점기 표준역사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재료와 구축방법이 변화된 1960년대 표준역사의 특징을 가진 드문 사례로 보존 필요성을 언급했으나 2008년 10월에 철거되고 금촌역은 거대한 신역사로 바뀌었다. 철로의 복선화와 이용객의 증가, 교통수단의 다양화 등으로 간이역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경의선 구간도 예외는 아니다.신촌역은 민자역사 개발로 인해 구 역사의 좌우 날개부분의 방향이 바뀌기도 했고 1933년에 지어진 일산역 구 역사는 2006년 등록문화재로 등록돼 역 기능은 사라졌지만 잘 남아있다.


▲ 교하동 행정복지센터

교하읍사무소와 교하읍 송덕비군

금촌역을 떠나 남서쪽으로 조금 이동해 교하 의용소방대를 지나면 교하동 행정복지센터가 나온다. 195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석조로 건축돼 현재까지도 관공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개보수가 있었으나, 전면 출입구의 진입 방식이 소규모 관공서 건물로는 특징이 있고 다소 투박하지만 1층 하단부와 창문 위쪽으로 각각 다른 크기의 돌을 사용했다. 건물의 주차장 영역에는 향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보이는 송덕비 10개가 모여있어, 건물과 송덕비군을 함께 보존할 필요가 있다.



임진각

2004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목록화보고서에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단면의 근대문화유산이 수록됐는데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 ‘파주 경의선 구 장단역 터’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파주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 등 4가지는 각각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76호에서 79호까지 등록됐다. 철원의 경우는 민간인통제구역 안에도 간단한 절차를 거치면 들어가서 직접 볼 수 있는 건조물이 있으나, 파주 장단면의 건조물은 보기가 어렵다. 모두 전쟁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 4개의 등록문화재 중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전쟁의 폭격으로 탈선돼 그 자리에서 녹슨 채 방치됐던 역사성을 강조해 현장에서 보존할 것을 제안했으나, 문화재 등록 후 민간기업의 보존 처리를 거쳐 임진각 안으로 옮겨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건조물과 달리 동산으로 취급된 기관차가 장소와 시간의 흔적을 현장에서 이동해 보존하게 된 것은 아쉬운 점이고 미래에도 남겨질 문화유산을 현재에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1971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 개발하기 시작한 임진각은 비무장지대와 인접해 전쟁의 흔적을 가진 문화유산을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다. 증기기관차 뿐 아니라, ‘철마는 달리고 싶다’ 기념물과 한국전쟁 당시부터 군 상황실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전시관으로 운영되는 지하벙커가 있다.

이와함께 경기도 기념물 제162호로 지정된 ‘자유의 다리’를 넘어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임진강 철교와 독개다리를 볼 수 있다.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2천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했기에 이름 붙여진 ‘자유의 다리’는 목구조에 철재를 함께 사용해 임시로 지어진 교량이다. 이 다리는 경의선 상하행 두 개의 다리가 폭격으로 파괴된 후, 서쪽 다리의 교각 위에 철교를 놓고 남쪽으로 연결한 것이다. 자유의 다리와 북쪽으로 연결된 이 다리가 경의선 임진강 철교다. 이 철교의 동쪽으로 교각만 남아있는 독개다리는 전쟁 때 파괴된 상태 그대로다. 12월에는 독개다리 위를 연결해 비무장지대까지 들어가는 관람 시설이 개방한다고 하니, 전쟁의 흔적으로 남겨진 유산과 임진강 일대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된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가 쓰여진 철도중단점 기념물에는 1953년 7월27일 철도가 중단됐다는 글와 함께 남쪽으로 부산과 목포, 북쪽으로 신의주, 평양, 함흥, 나진까지의 거리가 금속판에 새겨져 있다. 이 기념물 바로 옆으로는 미카3형 증기기관차가 함께 놓여있다. 미카3형 증기기관차는 일본에서 들어온 기차로, 국립대전현충원, 철도박물관, 제주 연동 삼무공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주차장과 방문차량들이 엉켜 있어,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달리 방문객들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관람 영역을 정비해 단순 관광지가 아닌 철도와 전쟁이 남긴 아픈 역사의 흔적을 온전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 리비교 전경
리비교와 미군홀

임진각에서 나와 37번국도를 따라 임진강의 상류로 한참을 이동하면 다리가 보인다. 37번 국도에서 장파리로 들어가는 교차로의 이름은 ‘리비사거리’로 불린다. 교차로의 서쪽으로 가면 철조망으로 막혀있는 북진교 민통초소가 나오고 10월14일부터 주민 안전을 위해 통행 금지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리게이트에 걸려있다. 이 북진교는 1953년 미군의 지원으로 제2공병단이 건설했고 다리의 서쪽으로 넘어가면 진동면 용산리로 연결되는데, 한국전쟁 이후 미8군 공병대대 소속 리비(George D. Libbby) 중사가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다리 일부를 폭파한 것을 기념해 ‘리비교’로 명명됐다. 총 길이 297m로 임진강 북쪽에 주둔했던 미2사단에서 이용하다가 1973년 철수한 이후 군용도로 관리되고 있다.

리비사거리에서 동쪽방향 장파리로 들어가면 특이한 입면을 가진 건물이 나온다. 1960년대 미군홀로 건축됐다고 전하는데,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다, 현재는 문화마을연구소라는 단체가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군 주둔이 지역사회에 경제적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는 건축물로, 정면의 입면 디자인이 뛰어나고 기둥과 벽면은 화강석 물씻기와 작은 자갈로 모양을 낸 마감으로 처리했다. 기둥의 안쪽 곡면이나 V자형 장식 기둥, 건물 본채의 지붕 모양을 전면에서는 가릴 정도의 높이로 벽체를 올린 부분은 전국 소규모 읍면단위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디자인 된 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 통일공원

통일공원

한국전쟁 당시 개성, 문산 지역 전투에서 공을 세운 제1사단 출신 장병들의 호국 영령을 기리기 위해 1959년 2월 월롱면에 건립됐던 충현탑이 통일로 확장으로 일부 부지가 잘려나가자, 같은 부대가 다시 이 지역으로 복귀하면서 1971년부터 1973년까지 현재의 3만9천669㎡(1만2천여 평)에 달하는 통일공원을 조성했다. ‘충현탑’ 이전(1972), ‘한국전 순직종군기자 추념비‘(1977), ’육탄십용사충용탑‘(1980), ’이유중 대령 기념비‘(1981) 등이 공원 내 자리하고 있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보듬고 평화의 도시로

한반도 남쪽에서도 남부지역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구조물들을 북부지역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바로 도로장애물이다. 도로 양쪽으로 콘크리트 기초 옹벽 위에 커다란 구조물을 올려놓고, 구조물 받침대를 폭약으로 터트려 구조물이 도로를 막는 것이다. 이는 전투시 적의 전차와 기동력 있는 차량이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빠져나가는 길목에서도 주로 경기 북부로 빠져나가는 주요 간선도로와 지방도로, 심지어는 작은 시골길에서 보이기도 한다. 아직 분단국가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기억장치이기도 하다.

파주 전역을 돌아보면 소도시의 변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물도 일부 남아있고 독특한 디자인과 특징있는 재료가 사용된 건축물도 남아있다. 또한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기능이 사라진 하천 교량과 파손돼 수십년의 시간을 그대로 거쳐 온 유산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전쟁의 실상을 기억하고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흔적을 그 자리에 남겨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온전하게 후세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다. 경기도 파주는 근대문화유산을 잘 보존해, 통일 시대 평화와 역사문화가 살아있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최호진 건축도시지역 연구활동집단 지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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