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품은 도시의 변화 (17)시흥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 갯골생태공원 내 남아있는 폐소금창고.
경기도 서남부 서해 및 인천광역시와 인접하고 서울과 10km 반경에 위치한 도시 시흥을 찾아간다. 299m 높이의 소래산이 말해주듯, 시흥 전체는 완만한 구릉과 평원으로 이뤄져 있다. 1989년 시로 승격될 당시에는 인구 9만3천여 명이었으나, 2016년 10월 현재에는 외국인 3만여 명을 포함해 43만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

시흥은 어떤 지역으로 돌아봐야 할 것인가. 인구의 변화를 보더라도 수도권의 확장과 함께 산업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도시형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들어섰고 전체 면적의 29% 가까운 논밭에서는 농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와함께 자연녹지를 포함한 바다, 저수지, 오이도, 시흥갯골 등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2004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목록화 보고서를 살펴보면 경기도의 여느 지역에 비해 시흥은 두드러지는 문화유산이 많은 곳은 아니다. 인접한 안산시에도 1930년대에 한옥으로 지어진 구 대부면사무소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정도로, 근대문화유산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시흥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근대문화유산은 소금창고를 들 수 있다. 소래포구와 협궤열차의 내용으로 이미 연재됐던 내용에서도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주거 도시 보다는 농업을 바탕으로 신흥 산업도시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시흥은 39번 국도가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영동고속도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제2경인고속도로 등이 수도권의 많은 도시들과 연결돼 있다. 최근에는 수인선이 연결되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멀지 않고, 주변에서 비슷한 거리로 시흥으로 들어갈 수 있기에 여러 코스를 살피다가 이 날은 안양을 통해서 시흥으로 들어갔다. 필자가 시흥을 찾은 날은 잔뜩 흐린 날씨였다.

▲ 소래중학교.

소래중학교

소래중학교는 1959년 3월 소사중학교 소사분교로 인가를 받고 1학급으로 개교했다. 1960년 2월에 6학급의 소래중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고 지어진 것이다. 현 교사는 지상 4층으로 당시 많은 학교 건물들이 문교부 표준 도면에 의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새로운 학교 건물과는 달리 학교 운동장과 구령대와 교사 건물은 단차이를 두고 있다. 건물 전면의 긴 도로와 측면을 통해 내부로 진입하며 오래된 교정의 나무들이 학창시절을 잠시 떠올리게 해 준다.


미산1동 마을회관

미산1동 마을회관은 인근 주민들이 직접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다. 처음 벽돌을 사용해 단층으로 지어진 후, 한 층을 더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건물 옥상의 나팔 모양의 확성기와 흐릿해진 마을회관의 나무 현판이 마을회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주민자치센터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며 건물 뒤편으로는 아파트 단지들이 지어지고 있다. 마을회관 앞 도로에서는 동쪽으로 넓은 들을 조망할 수 있어, 시흥의 풍요로운 모습도 잠시 살펴볼 수 있다.

▲ 공장

공장

미산1동 마을회관 옆으로 단층의 공장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새마을운동 때 가마니를 짜던 곳으로 사용해 넓은 작업장이 있으며 현재는 여러 소규모 공장의 작업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변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주택과 도로의 현황으로 보아 지어질 당시 마을의 중심지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흙벽이 떨어진 부분에 벽돌과 블록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 넒은 들을 바라보는 위치의 주민참여 건물 둘

넓은 들을 바라보는 위치의 주민참여 건물 둘

두 건물은 주민들의 참여로 건립돼 주민들의 애착이 큰 건물로 마을 단위의 공동 작업으로 이뤄진 산물이다. 이제는 이러한 건물들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을 커뮤니티 공간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겨질 필요가 있다.


물왕저수지

물왕저수지의 공식 명칭은 흥부저수지다. 저수지를 설치한 194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이 시흥군과 부천군이었기 때문에 시흥군의 ‘흥(興)’자와 부천군의 ‘부(富)’를 택해 흥부저수지라고 이름 붙였다. 물왕저수지는 시흥시 최대의 담수호로 면적은 60ha, 급수면적은 867ha이고 만수 때의 수심은 7.2m에 이른다. 이 저수지는 서울, 안양, 안산 등 수도권에서 가깝고 주변에 관무산, 마하산, 운흥산이 둘러싸고 있어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낚시터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전용 낚시터를 만들어놓고 자주 들러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현재는 저수지 주변으로 여느 저수지 주변과 비슷하게 많은 음식점촌이 형성돼 있다.

▲ 신안 주시 삼세적선비.

신안 주씨 삼세적선비

신안 주씨 삼세적선비는 현 과림동의 주석범, 주순원, 주인식·주영식 등 주씨 가문의 3대가 자선을 베풀자 은혜를 입은 과림동 중림·부라위와 계수리(현 계수동) 안골 등 주민들이 세운 비다. 신안 주씨 3대에 걸쳐 춘궁기 때 매년 구휼하고 세찬을 나눠주고 영농비를 지원해 주자, 수혜자인 해당 주민들이 적선비 창립을 발기하고 주민 전원이 협동해 1917년 4월20일에 적선비를 건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1922년 2월에는 다시 적선비각을 건립했다. 신안 주씨의 자선, 주민들의 노력을 통해 일제강점기 과림동과 계수동의 마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지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삼세적선비 바로 옆에는 ‘주영식 자선기념비’가 함께 있어 기록적인 가치도 높다. 작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어,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고 기억하는데에 좋은 문화유산이다.

▲ 하연신도비.

하연신도비

시흥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돼 있는 하연 선생 묘는 단종 1년(1453년)에 조성됐다. 하연(河演·1376~1453)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태조 5년(1396년) 문과에 급제했고 세종 31년(1449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묘역을 올라가는 길 옆으로는 선생의 재사(齋舍)가 있는데, 세조 1년(1455년)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돼 1963년에 다시 세웠고 1995년 국내 유림들의 중의에 따라 재건하면서 소산서원(蘇山書院)으로 개칭했다. 묘역에 오르면 남쪽으로 시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묘역과 주변 전체를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특이한 점은 묘역의 동남쪽 200m 떨어진 곳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이 신도비는 1940년 10월에 건립했는데,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을 취하고 있어 18세기부터 크게 유행하던 방부개석 양식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 구 충경사

구 충경사

196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조적조에 한식 지붕으로 구성돼 있다. 주변 담장과 후면 벽체가 붉은 벽돌 마감이며 후면에 인접해 야산이 자리하고 있다. 2004년 목록화 사업 당시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근대 시기의 사당으로 가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기슭 마을 안쪽에는 쇠락한 주택들이 필요시 보수를 해가며 계속 기능을 이어나가고 있고 작은 공장 시설들도 들어왔다. 큰 길에서 벗어난 한적한 동네에도 근현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 갯벌과 염전

갯벌과 염전

시흥시 포동, 방산동, 장곡동, 월곶동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 약 92만5천619㎡(28만평) 규모의 시흥갯벌은 경기도내 현존하는 유일한 내만갯벌이며 수려한 자연 경관과 함께 염생식물 등 다양한 종의 생물과 희귀동식물의 서식처로 생태학적 보존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시흥갯벌은 염전, 간척지, 패총 등 해양 관련 시흥시의 역사적, 지리적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시흥시는 이를 기반으로 환경생태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포동 새우개와 신촌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는 폐염전은 1934년 일본인이 투자해 2년 뒤인 1936년에 완성됐고 1996년 7월31일에 폐쇄됐다. 시흥에는 이러한 폐염전이 포동과 월곶을 중심으로 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면적은 포동 면적이 106만101㎡, 월곶 폐염전 190만6천150㎡ 등이다.

2000년대 초중반 소금창고의 문화재 등록이 추진되자 소금창고가 헐려 나갔다. 등록문화재 정착 시기, 문화재라는 용어가 아직도 강력한 규제의 용어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금창고들이 없어진 염전에는 아직 염전관리사무소로 쓰이던 건물이 남아있다. 이 폐쇄된 염전 부지 내에 붉은 벽돌 마감의 건물은 특별한 관리가 이뤄지지는 않으나 아직 잘 남아있다. 시멘트 뿜칠 마감을 한 건물은 쇠락해 겨우 서 있는 듯 보인다. 2004년 목록화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관리동에 3동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으나 현재는 두 동의 건물이 남아 이곳에서 소금이 생산되던 시기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서해안의 많은 염전 시설들이 꾸준히 운영되는 곳도 있지만 그 기능이 상실되거나 매입과 개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직도 옛 염전 시설 주변으로는 갯벌 보전을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걸려있기도 하고 갯골 생태공원 등 자연 자원을 이용한 방문 시설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갯골 생태공원에서는 주변을 조망하는 전망탑이 세워져 있어 동서남북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으며 폐소금창고는 새로 지어진 소금창고와 함께 교육과 체험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소금은 체험으로만 만들고 있고, 소금창고 또한 더 이상 소금을 보관하지 않는다.

시흥갯골은 소래염전으로 불리던 구 염전지역 안에 위치하고 있다. 갯골 생태공원은 시흥시 포동과 장곡동 일대 폐염전 지대 중 소래염전 갯골을 중심으로 소금창고 등을 갖춘 염전 체험장과 해안학습교실 등의 조성 계획을 가지고 폐염전 둑을 순환하는 자전거도로와 해안습지생태공원을 단계별로 조성한 것이다. 주변에는 골프장도 있으며 자전거 둘레길과 캠핑장도 조성이 돼 있다.

주목할 건물은 바로 소금창고이다. 2004년에 크게 파손됐던 창고도 정비를 거쳐 옛 모습의 소금창고 2동이 공원 내에 서 있다. 소금창고는 내부의 소금의 무게를 견디도록, 측면의 기둥과 판재들이 위쪽이 좁은 폭으로 만들어져 있다. 소금을 엄격하게 관리하던 일제강점기, 소금 창고는 갯골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배치돼 있었고 새우개마을 쪽으로 23동이 배치됐으며 북쪽으로 17동이 배치됐다. 배로 운방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갯골을 중심으로 일렬로 배치된 것이다. 멀리서 보면 군락을 이루듯 보이던 소금창고는 사라지고 옛 것은 2동만이 남아있다.

시흥의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고 있고, 생태계자원도 잘 활용해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새로운 땅에 건설되는 신도시도 필요하지만, 자연 자원을 바탕으로 산업과 생활유산으로 남겨야 할 것들도 이제는 소중하게 다뤄, 역사가 있는 체험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최호진 건축도시 연구활동집단 지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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