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속에 속세 공간 (14)수락산 흥국사(興國寺) 만세루방(萬歲樓房)

▲ 흥국사 대방 내부모습

남양주의 덕능마을 입구에서 20분 정도 길을 오르면 옛 절이 있다. 별내면 덕송리에 있는 수락산 흥국사다. 이 절은 조선시대에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 묘를 보살폈던 곳으로 주변에는 덕흥재실, 덕릉마을 산신각이 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성계와 관련됐거나, 역사기록을 보관하거나, 왕실의 능을 관리하는 사찰을 중수하거나, 중건할 때 불교사찰을 공식적으로 후원한 기록이 있고 비공식 후원도 꽤 있었다. 조선말이었던 고종, 흥선대원군, 왕실 여인들이 도성에서 가깝고 왕실 능묘를 돌보는 서울 경기지역 사찰에 후원하고 세자 탄생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때 후원한 사찰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곳이다. 암자 정도의 규모였다가 후원을 받아 사찰의 격식을 갖추게 된 곳도 있다.

▲ 흥국사 대방 전면

이번에 찾아간 근대문화유산은 수락산 흥국사에서 만세루방이라 불리던 대방(大房)이다. 손신영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흥국사지 기문으로 정리한 흥국사 연혁에는 599년에 원광법사가 수락사를 창건했으나, 조선 선조때까지 기록이 전무하다. 흥국사의 구체적인 역사는 선조 즉위 후 1568년에 흥덕사라 한 때부터다. 인조 4년인 1626년에 흥국사가 됐으며 이후 기록이 거의 없다가 정조 때부터 기록이 증가한다. 정조때 만세루를 조성했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1830년에 그 터에 30칸 규모로 만세루방을 세웠다. 그러나 1877년에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공사로 37칸으로 증축했다.

문화재청의 자료에 의하면 수락산 흥국사 대방은 ‘흥국사사적(興國寺事蹟)’ ‘흥국사만세루방중건기공문(興國寺萬歲樓房重建記功文)’ 등 사료에 연혁이 적혀있으며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며 극락정토에 왕생을 비는 정토 염불 사상이 성행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건물이다. 특히 대웅보전을 불단으로 삼아 큰 방을 염불 공간으로 쓰고 누, 승방, 부엌 등 부속 공간을 갖춘 복합 법당이다. 전통 사찰의 건축 원리에서 벗어난 복합적이고 기능적인 근대적 건축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독특한 건축 형식, 공간 구성 및 시대정신을 갖춘 곳으로 평가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근대 종교 건축물로 인정받았다. 2011년 4월29일에 등록문화재 제471호가 됐으며 서울 경기근교의 여러 대방 중에 첫 사례였다. 최근에 복원 및 보수공사를 끝마쳤다.

수락산 흥국사 대방이 문화재가 된 이후에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대방(2013년 12월20일, 등록문화재 제583호)과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노고산 흥국사 대방(2014년 7월1일, 등록문화재 제592호)이 뒤를 이어 등록됐다.

수락산 흥국사 대방의 문화재 등록이유에서 보듯이 대방은 옛 사찰에 없는 형식이다. 승려가 생활하는 요사채에 신도가 사용하는 누와 부엌을 붙여둔 것은 부처를 생각하는 성스러운 공간과 인간의 속세공간을 혼합한 것으로 ‘절 속에 속세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대방은 서로 상반되는 기능을 융합한 곳이다. 큰 방은 염불을 하면서 음식을 공양하는 승려와 신도의 영역이 어우러진다. 좁은 터에서 주불전과 마주하는 배치이기도 해서 서울 경기 지역 외에 유서 깊은 대규모 사찰에서 대방을 배치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화재청 김성도 서기관은 원래 누(樓)가 있던 자리에 대방을 설치해 누방(樓房)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주불전 전면에 위치한 누의 기능이 발전했고 조선말 염불이 성행해 생긴 공간으로 수락산 흥국사에서 만세루방이라 불리던 대방이 해당한다.

수락산 흥국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좁다. 주변에 음식점을 찾는 차들이 오가서 어수선하다. 오고가는 차를 비켜서 있기를 반복하며 일주문까지 오르는 길이 버겁게 느껴질 정도다. 겨우 찾은 일주문에서도 절 경내가 보이지 않는다. 쭉 뻗은 길을 올라서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꺾어야 비로소 대방이 보인다. 대방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영산전과 대웅보전이 있고, 경내에는 시왕전, 독성각, 단하각, 범종각, 응향각 등 10여 채가 있다.

▲ 흥국사 대방 평면도

수락산 흥국사 대방은 앞뒤에 마당이 있다. 앞뜰은 큰방에서 내려다 본 평평하고 너른 터다. 궁궐에서 손님이 오면 누에 앉아서 앞마당에서 열린 연회를 보았을까? 내려다보기 좋은 높이였을 것이다. 즐거운 연회를 상상해본다. 대웅보전과 대방의 사이에 뒷마당이 있다. 두 건물 사이에 끼어있는 마당은 답답할 정도이지만, 대방의 툇마루와 큰방에서 대웅보전의 설법을 듣기에 적당한 거리다. 땅의 높이 차이로 큰방에서 높은 곳의 대웅보전의 불상을 보면 경외심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대방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7칸이다. 실구성과 내부를 살펴보면, 서로 성격이 다른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툇마루로 적절하게 연결한다. 툇마루와 누의 마루는 우물 정(井)자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장마루로 변형됐다가, 복원했다. H자 평면은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복합 용도에 적합하다. H형태에서 아래 날개에 해당하는 왼쪽이 누이며 오른쪽은 승방이다. 누는 손님 접객용이고 승방은 스님의 공간이다.

건물에서 중심을 잡는 곳은 중앙에 있는 큰방이다. 그 좌우에 부엌과 승방이 있다. 대웅보전으로 가는 길에 부엌을 두고 승방은 그 반대편인 우측으로 분리했다. 큰 방은 개보수를 거치면서 방을 트기도 했으나, 복원공사로 원래 상태로 돌려놨다. 부엌과 접한 큰방은 음식 공양을 손쉽게 할 수 있다. 기능을 앞세운 합리적인 평면이다. 큰방이 많은 사람이 모이고 염불당의 역할을 했다면, 승방은 한 사람을 위한 작은 방부터 다양한 크기의 방이 있다. 승방 크기를 조절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구분했다.

밖으로 나와 대방을 보면 경사진 대지에 자리해 앞쪽은 이중기단이고 뒤쪽은 단층기단이다. 앞쪽 기단에서 아랫단은 덜 다듬어진 돌을 쌓았다. 몇 단 위에 있는 윗단은 직사각형으로 잘 다듬은 돌을 정갈하게 쌓았다. 무척 공을 들인 다듬돌 바른층 쌓기이다. 마치 궁궐의 기단을 보는 듯하다.

앞쪽 날개에 해당하는 누와 승방은 네모반듯한 돌에 기둥을 받쳐놨다. 기둥은 원형과 네모형을 혼용했고 전면의 양 측면은 원기둥이지만 기타 부분과 건물 내부 전체는 네모형 기둥을 사용했다. 이런 구성으로 큰방과 누에 비중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기둥과 지붕을 보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댄 공포에 연꽃을 조각하고 지붕 용마루위에 용머리 장식부재를 뒀으며 대방의 뒷면은 대웅보전 쪽은 맞배지붕이지만 나머지는 팔작지붕에 겹처마 형식으로 건물 전면에 공을 들인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 흥국사 대방 측면

복합공간이므로 화재 대비도 철저했다. 누 하부와 건물 양측면의 일부에는 화재를 막을 목적으로 두껍게 벽을 쌓았다. 하부에 막돌을 쌓을 때 아래는 큰 막돌이며 점차 작은 막돌로 했고 상부는 벽돌로 아름답게 치장을 했다. 건물 뒤쪽과 일부의 하부는 장식이 없는 밋밋한 벽이다. 불을 사용하는 부엌은 널빤지를 달아맨 부엌문 상부와 양 옆 벽에 나무를 좁게 세워댄 홍살을 둬 공기 흐름이 좋고 환기가 잘 된다.

옛 절에서 근대문화유산을 찾는 일은 생소할 것이다. 전통건축과는 다른 형태와 근대적으로 공간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려 이곳을 찾아간다면 길목이 어수선해 놀랄 것이다. 식당에서 음식과 술을 먹고 절 내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알림과 지나는 길에 관한 소유권을 쓴 현수막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대방이 절 속의 속세 공간이었다면 일주문 밖은 곧바로 속세공간이었다. 이 소란을 뚫고 절로 들어가면 갑작스러운 고요함에 한 번 더 놀랄 것이다. 시끄러운 속세에서 깊은 산속으로 순간 이동을 한 기분으로 대방을 보는 여유를 만끽해보시라.


이현정 건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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